기획 완결 열하일기로 배우는 나라사랑

“청나라 황실에도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나니…”

입력 2016. 09. 2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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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건륭제와 조선의 후예


포로로 잡혀갔던 의주 출신의 후손

숙가황귀비, 빼어난 미모로

건륭제 총애 받고 황자 4명 낳아

오빠는 청 호부시랑인 김간

중국 활자 개량에 큰 업적 남겨

 





달밤에 혼자 거닐며

연암 박지원이 1780년 9월 7일 저녁 윤가전·기풍액과 마치 친한 벗처럼 필담을 끝내고 나왔을 때, 뜰에는 달빛이 가득했다. 담 너머 군사령부에서는 저녁 9시를 알리는 조두(조斗·낮엔 취사용, 밤엔 징으로 사용했던 군용 장비) 소리와 목탁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진다.

숙소로 가니 모두 잠이 들었는지 조용하고, 사절단 대표의 방에는 낮은 병풍을 세워 대표와 연암의 잠자리가 구분돼 있다. 연암은 대표 머리맡에 놓인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운 뒤, 등불을 끄고 나왔다. 술잔을 들고 홀로 뜨락에 서서 밝은 달을 쳐다보는데, 담장 너머 군사령부에서 낙타 우는 소리가 들린다.

명륜당에 가보니 청나라 관리와 통역들이 불경스럽게도 신성한 제물을 놓는 탁자 위에 잠들었고, 오른편 문간방에는 사절단의 통역과 군관들의 코 고는 소리가 가관이다. 거꾸러진 병목에서 물이 꼴깍꼴깍 쏟아지는 소리, 이빨이 무뎌진 톱으로 나무 켜는 소리, 혀를 차며 사람을 꾸짖는 소리, 투덜대며 누구를 원망하는 소리.

달그림자를 동무 삼아 한참 노닐다 보니, 명륜당 뒤뜰의 고목 잎사귀마다 맺힌 찬 이슬들이 달빛을 받아 구슬처럼 빛난다. 어느새 자정을 알리는 소리와 연암의 탄식 어린 독백이 거의 동시에 울려 퍼진다.

“아아, 이같이 좋은 밤, 아름다운 달빛 아래서 함께 노닐 사람이 없다니!”


효의순황후와 제15 황자 영염(가경제). 필자 제공

청나라 대궐에 들어가다

쓰러지듯 베개에 머리를 파묻은 지 몇 시간이 흘렀을까? 연암은 9월 8일 꼭두새벽, 졸리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절단 일행을 따라나섰다. 청나라 통역관의 안내로 우선 중국 삼국시대 영웅 관우의 위패를 모신 관제묘로 갔다. 잠시 휴식한 뒤 서장관은 그곳에 남고, 대표와 부대표가 대궐로 들어갈 때, 연암도 수행했다.

단청 장식이 없는 대궐 문 위에는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일행은 문 안쪽의 오른편 곁채로 들어갔는데, 그곳은 예부상서(외교·교육부 장관)가 황제를 알현하기 전에 대기하는 방이라고 한다.

방에 들어가자, 한족(漢族) 예부상서 조수선이 의자에서 일어나 반갑게 맞는다. 서로 4~5차례 먼저 앉으라고 양보한 끝에 대표와 부대표가 먼저 앉는다. 조수선이 몇 마디를 나누고 나가자, 만주족(滿洲族) 예부상서 덕보가 들어와서 인사했다.

참고로 연암은 열하일기의 ‘행재잡록(行在雜錄: 행재소에서 두서없이 적은 글)’ 편에 청나라 6개 중앙부처의 상서(장관)와 시랑(차관)에는 한족과 만주족이 각 1명씩이라고 소개했다.

얼마 후, 황실의 음식이 담긴 그릇 세 개가 나왔다. 나무그릇 두 개에는 각각 백설기와 과일이, 은그릇에는 돼지고기구이가 담겼는데, 황제의 아침 수라상에서 거둬온 것이란다.

사절단 대표와 부대표는 청나라 통역의 안내로 대궐 문밖으로 나가서 황제가 머무르는 궁전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조아리는 예의를 갖춘 다음에 다시 방으로 들어왔고, 이때 연암은 대궐 밖으로 나왔다.

수많은 말과 수레가 무리를 지어 대기 중인데, 말들은 담장을 바라보고 목마처럼 꼼짝 않고 서 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서고, 주위가 숙연해지며, 떠들썩한 분위기가 싹 가라앉았다. 건륭제의 제6 황자(여섯째 아들) 영용(永瑢)이 말을 타고 궐내로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그의 모습은 연암의 눈에 생생하게 잡혔다.

“얼굴은 흰데 천연두를 앓아 얽은 자국투성이고, 콧날은 낮고 작다. 볼은 아주 넓으며, 눈은 희고 눈꺼풀은 세 겹이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가슴이 널찍하여 체구는 건장하나, 도무지 귀한 기색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문장·글씨·그림에 뛰어나서 지금은 ‘사고전서(四庫全書: 총 8만 권에 이르는 중국 최대의 학술서적 전집)’ 편찬의 총책임자라고 한다.”



피서산장 현판. 필자 제공

건륭제가 총애했던 조선인

열하일기에는 건륭제의 제5 황자에 관한 기록도 보인다.

“건륭제의 제5 황자는 호가 등금거사다. 그는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던 귀비(貴妃)가 낳은 아들이며, 청나라 호부시랑(재무부 차관) 김간(金簡)의 조카다. 귀비가 김간의 누이동생이기 때문이다. 등금거사는 건륭제의 마음에 들어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일찍 사망했고, 지금은 영용이 총애를 받고 있다.”

제5 황자의 본명은 영기(永琪·1741~1766)이며, 호가 등금거사이고, 25세에 요절한 것은 맞다. 그러나 연암이 그를 김간의 조카이자 조선인의 피를 받은 인물처럼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김간의 조카는 제5 황자가 아니라, 제4 황자인 영성(永珹·1739~1777)이다. 참고로 청나라 황실의 성(姓)은 애신각라(愛新覺羅)다.

김간은 17세기 초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의주 출신 조선인의 후예다. 김간의 가문은 할아버지 김상명(金常明)이 옹정제 때 외교·교육부 장관을 지낸 이후 청나라의 명문가가 되었고, 높은 벼슬에 오른 이가 여럿이다. 특히 건륭제가 매우 총애했던 숙가황귀비(淑嘉皇貴妃, 1717~1755)가 김간의 누이동생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건륭제는 황후가 3명, 황귀비가 5명, 귀비가 5명이었고, 이들이 아들 17명, 딸 10명을 낳았다. 숙가황귀비는 건륭제의 사랑을 듬뿍 받아 아들 넷을 낳았다. 바로 제4, 제8, 제9, 제11 황자다. 건륭제의 여인 중에서 가장 출중한 미인이었던 그녀는 안타깝게도 38세로 타계했다.

건륭제의 17명 아들 중에서 4명을 출산한 여인이 또 하나 있다. 숙가황귀비가 사망한 뒤 건륭제가 부쩍 가까이했던 효의순황후다. 그녀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는데, 그중 하나가 건륭제의 뒤를 이은 제15 황자 영염(永琰·1760~1820)이다. 그는 황제(가경제)가 되자 이름을 옹염(옹琰)으로 바꿨다.

연암이 청나라에 갔을 때 김간은 재무부 차관이었으나, 이후 상공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동생은 국방부 차관, 아들은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 특히 그는 제6 황자가 총책임자였던 ‘사고전서’ 편찬의 부책임자로서 실질적인 지휘를 했으며, 중국 나무활자 개량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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