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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클라크 대위 “팔미도 등댓불 내가 밝혔다” 주장

입력 2016. 07. 13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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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공로자 (하)


책으로 출판된 사후 수기서 증언

“美 극동군사령부 근무 중 특명 받고 계인주 대령·연정 소령과 임무 수행”

등댓불 방식 등 최규봉 주장과 달라

새 증인 나타날 때까지 진위판정 유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서 해안을 향해 돌격 중인 해병대.  연합뉴스

 

 





미 첩보대장 유진 클라크, 수기에서 자신이 공로자라 주장

재미작가 조화유 씨는 우연한 기회에 인천상륙작전의 또 다른 공로자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정리해 한국 언론에 알렸다. 그 주인공은 미 해군 첩보부대의 유진 클라크(Eugene F. Clarke) 대위다. 그는 이미 고인(1998년 사망)이 됐지만 수기가 사후에 발견돼 책으로 출판됐고, 그 수기에서 인천상륙작전 때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켠 사람은 자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다음은 클라크 대위의 수기를 요약 정리한 내용이다

①맥아더 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전에 먼저 인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8월 26일 도쿄(東京)의 미 극동군사령부 G-2(정보부)에서 근무하던 클라크(당시 37세) 해군대위를 호출했다. 그리고 그에게 인천 앞바다의 자연조건(수심, 간만의 차이 등)과 월미도의 적 병력 상태 그리고 기뢰 설치 여부, 등댓불의 작동 여부 등을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②클라크 대위는 일단 같이 일할 사람을 모집하기 위해 대구로 날아갔다. 거기서 그는 전에 G-2에서 함께 근무했고 영어가 유창한 한국 해군소령 연정(당시 30세)과 육군방첩부대장을 지냈고 역시 G-2에 근무한 바 있는 계인주(당시 42세) 대령을 차출해 일본으로 갔다. 그리고 한국에서 작전할 때 필요한 쌀 등 식료품과 한국 돈 100만 원도 마련했다.

③클라크 대위와 두 한국군 장교는 8월 말 일본 사세보 항에서 한국 전선으로 가는 영국 해군 함정에 편승, 9월 1일 인천 앞바다 덕적도 근처에 도착했다. 2주일간 클라크 대위를 지원해줄 한국 해군(함정 1척 포함)과 만나기로 약속돼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함정(PC-703호)의 선장은 이성호 중령(후에 해군참모총장이 됨)이었고 함명수 소령(첩보장교, 후에 참모총장)의 안내를 받았다.

④영흥도를 주요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면서 인천 앞바다에 관한 정보를 수집, 도쿄의 사령부로 타전했다. 9월 3일 밤 연정 등 한국인 특공대원들을 데리고 팔미도에 들어가 보았다. 등대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잠겨 있었다. 적군이 팔미도에 없다고 판단한 클라크 일행은 곧 그곳을 떠나 영흥도로 돌아왔다.

④9월 9일 밤 클라크 대위 일행은 다시 팔미도에 상륙, 이번엔 등대에 들어가 보았다. 그는 기계에 찍힌 글을 보고 등대에 불을 밝히는 기계가 프랑스 파리에서 제작됐고, 석유를 태워서 빛을 내는 석유등임을 알 수 있었다. 석유통에는 기름이 반쯤 남아 있었고 불을 붙여보니 별 이상이 없었다. 도쿄 사령부에 “등대 사용 가능. 점등 시각 지시 요망”이라고 무전을 보냈다.

⑤9월 14일 클라크 대위는 사령부로부터 ‘15일 0시30분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라는 명령을 무전으로 받았다. 이날 클라크 일행은 영흥도에 있었는데, 경계병을 해치우고 팔미도에 상륙했을 때는 이미 15일 0시50분. 등댓불을 켜야 할 시각이 지났다.

⑥9월 15일 0시50분, 마침내 등대의 불을 켰다. 그는 20분이나 늦게 ‘등댓불’을 켠 데 대한 불안감이 생겼다.

⑦날이 밝자 클라크 대위는 연정·계인주와 함께 발동선을 타고 맥아더 장군이 있는 매킨리함으로 갔다. 매킨리함에서 경비정이 나와 ‘접근중지’를 명했다. 신원이 확인된 후 그와 연정 그리고 계인주 세 사람은 매킨리함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미 제1해병대대의 상륙작전을 지켜보고 있는 맥아더 장군.  연합뉴스

 

 


최규봉 씨가 등댓불을 밝힌 후 맥아더장군이 타고 있는 매킨리함을  향해 가고 있는 모습이라며 공개한 사진(왼쪽부터 유진 클라크 해군대위, 연정 소령, 선원, 옆으로 선 사람이 최규봉, 존 포스터 육군중위, 계인주 대령, 클락 혼 육군소령). 필자 제공

 

 

 

최규봉의 증언과 다른 점

①클라크 대위의 수기에는 한국 참가자로 연정·계인주 두 사람의 이름만 등장하고 최규봉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②수기에는 맥아더를 만나 격려받았다는 얘기가 없다. 맥아더를 만났다면 가문의 영광인데 왜 기록에는 없나? 혹시 최규봉의 과장은 아닐까?

③등대도 최규봉은 전기식이라고 했는데, 클라크는 프랑스제 ‘석유등’이라고 명확히 밝혔다(당시 등은 ‘석유 백열등’이고, 방향을 돌리는 것은 전기식).

④등댓불을 켠 시각도 다르다. 최규봉은 1시50분, 클라크는 0시50분. 1시간의 차이가 난다.

⑤최규봉은 등댓불을 켠 후 6명이 발동선을 타고 맥아더가 있는 기함으로 갔다며 사진을 증거로 제시했는데, 당시 이 작전을 안내해준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은 그 사진은 그 전에 찍은 것이라고 증언.

⑥맥아더가 ‘특명’을 팀장인 미 첩보대장에게 내린 것은 이해되지만, 협조자인 한국인 최규봉 씨에게 내렸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최규봉의 증언은 일부 거짓일 가능성이 크며, 또 다른 증인이 나타날 때까지 진위 판정을 유보해야 할 것이다.


<배영복 전 육군정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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