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열하일기로 배우는 나라사랑

“난공불락 산해관도 내부의 적에 의해 무너졌나니…”

입력 2016. 06. 3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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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내·외부 적을 모두 경계해야


산해관 지키던 오삼계

청의 도르곤에게 투항 명 멸망

조대수 항복도 언급하며 탄식

후세에 큰 교훈으로 남겨

 

 

조대수 패루. 필자 제공

 

 





6·25를 상기하며 읽는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은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등 이른바 미국 독립의 아버지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 240년 전 독립을 선언했던 미국은 현재 세계 최고의 경제력과 국방력을 갖춘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이런 발전의 이면에는 미국인이 금과옥조처럼 마음에 새기고 사는 좌우명이 있다.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평화를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다.”(워싱턴) “우리는 거의 완벽한 공화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후손들은 이 나라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행여나 풍요로움을 만끽하다가 자유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지는 않을까? 인격이 없는 물질적 풍요는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첩경이다.”(제퍼슨)

이는 묘하게도 17세기 초 명나라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던 전쟁터를 연암이 1780년 8월 17일부터 22일까지 둘러보고 열하일기에 남겨놓은 메시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북한 공산집단의 불법남침으로 큰 시련을 겪었으나, 세계가 부러워하는 국력과 자유민주주의를 꽃피운 우리도 미국인의 좌우명과 연암의 메시지를 오늘 한 번쯤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홍타이지(청 태종) 초상화.  필자 제공

 

 

 

대릉하성 전투

본 연재물 제17회분에 소개했듯이 연암은 ‘구요동기’에서 1626년 사르후 전투와 1627년 영원성 전투를 다뤘다. 당시 원숭환 장군은 누르하치(청 태조)에게 패배를 안기고 사망케 했으며, 홍타이지(청 태종)의 공격도 격퇴했다. 그러나 1630년 명나라 황제는 간계에 속아 그를 능지처참시켰다. 열하일기의 ‘일신수필’에는 그 이후 14년 동안의 명나라 패망 과정이 그려졌다.

1631년, 홍이포 등 서양식 무기 제작에 성공한 청 태종은 이를 앞세우고 영원성으로부터 60㎞쯤 동북쪽에 위치한 대릉하성을 공략했다. 당시 성을 지키던 장군은 요서 지방의 이름난 군인 집안의 후예 조대수였다. 그의 아버지 조승훈은 임진왜란 때 ‘요동부총병’으로 명나라 기병 3000명을 이끌고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참전했던 인물이다.

더구나 조대수는 사르후와 영원성 전투에서 원숭환을 도와 혁혁한 전공을 올렸던 인물이다. 그 때문에 명나라 황제는 조대수와 그의 사촌 형 조대락의 공적을 기리는 패루 2개를 영원성에 세워줬다. 그러나 영원성 전투 후 불과 4년 만에 명나라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있었다. 연암은 탄식했다.

“조대수는 대릉하성이 포위되어 양식이 떨어지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지금도 그의 패루가 우뚝 서 있으나, 그 집안의 명성은 이미 땅에 떨어져서 후세 사람들의 웃음거리나 될 뿐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홍이포. 필자 제공

 

 

 

송산과 행산 전투

1636년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했다. 국왕 인조는 이듬해 2월 24일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는 항복을 했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은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1639년 청 태종은 중국 본토로 통하는 관문인 산해관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그러자 1640년부터 1642년까지 그 외곽의 금주·송산·행산·탑산을 공략해 모두 차지했다. 연암은 이를 ‘송행의 전투’라고 이름 붙이고 그 하이라이트를 청나라 건륭제의 시를 인용해 소개했다.

“1641년 9월 명나라 총사령관 홍승주가 병력 13만 명을 송산에 집결시켰다. 청나라군의 출병은 태종이 사흘간 코피를 쏟는 바람에 지체되었다. 그러나 행군을 개시하자 엿새 만에 송산에 도착하여 송산과 행산의 통로를 차단함으로써 명나라 군사를 분열시켰다. (중략)

전투 결과, 명나라 병사 5만3700명을 사살하고, 말 7400필과 갑옷 9300벌을 노획했다. 반면, 청나라군의 부상자는 겨우 여덟 명뿐이고, 그 밖에는 피 한 방울 흘린 병사도 없었다.”

피해 상황이 과장돼 보이지만, ‘송행의 전투’에서 명나라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총사령관 홍승주가 항복했으며, 1631년 항복 후 기지를 발휘해서 금주로 도피한 조대수도 다시 항복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장수 오삼계와 왕박은 가까스로 도망쳤다.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전투에 출병했다가 위태로운 상황을 모면했다.

1640년 초부터 청나라의 파병 압력을 받은 조선은 그해 말 임경업과 이완 장군 등 4000명을 바닷길로 금주에 지원병을 보냈다. 그러나 조선군은 명나라군과 내통하며 전투를 피했으며, 포병 이사룡은 탄환을 빼고 공포를 쏘다가 청나라군에 처형되었고 후일 고향에 옥천서원과 사당이 세워졌다.

조선왕 인조는 ‘송행의 전투’에 관해 수시로 보고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그의 통역이었던 조선의 관노 출신인 정명수가 조선의 조정을 농락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1642년 11월 용골대의 자식 결혼 때 오늘 돈으로 수억 원 상당의 특산품을 보냈으며, 정명수는 조선의 고위관직에 올랐을 뿐 아니라 그의 친척과 지인들도 지방관에 임명됐다.



오삼계와 애첩 진원원(상상도). 필자 제공

 

 

 

산해관이 열리다

1643년 초, 청 태종이 사망하자 그의 다섯 살배기 어린 아들이 황제에 즉위했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숙부인 도르곤이 행사했다.

한편, 명나라에서는 이자성이 일으킨 반란군이 1644년 봄에 연경의 자금성을 점령하자 마지막 황제는 자살했다. ‘송행의 전투’에서 도망쳐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는 이자성에게 투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가족, 특히 애첩이 이자성에게 잡혔다는 소문을 듣고 청나라의 도르곤에게 투항했다. 이로써 난공불락이던 산해관이 열리고 명나라는 패망했다. 연암은 말한다.

“슬프다! 진시황은 호(胡)로 불리던 흉노족을 막으려고 몽염에게 장성을 쌓도록 했다. 그러나 진나라를 망친 것은 진시황의 열여덟 번째 아들 호해(胡亥)였으니 집안에서 오랑캐를 키운 것 아닌가? 명나라 태조도 오랑캐를 막으려고 서중산(본명: 서달)에게 산해관을 짓도록 했다. 그러나 오삼계는 관문을 열어 오랑캐를 맞아들이기에 급급했다.

이제 세상이 전쟁 없는 평화로운 때가 되어 이곳을 지나는 여행객과 장사꾼들은 통행세를 받는다고 투덜대고 있으니, 내가 산해관에 대해 또다시 무엇을 얘기하겠는가?”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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