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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빛난 항공력 낙동강방어작전·인천상륙작전 승리를 열다

김상윤

입력 2016. 06. 23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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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속 항공전





당신은 6·25 전쟁을 어떤 전쟁으로 기억하는가? 6·25 전쟁은 한 민족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눈 전쟁이며, 미·소의 대립과 냉전이 낳은 시대의 비극이었다. 또한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고자 지상군이 치열한 공방을 벌인 고지전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당신이 잘 몰랐던 6·25 전쟁의 얼굴이 하나 더 있다. 이 전쟁은 공군의 공중우세가 결정적 역할을 한 ‘항공전’이었다. 또한 공중급유기의 첫 실전 데뷔, 최초의 대규모 제트기 공중전 등 당시의 역사는 특별한 항공사적 의미가 있다. 항공전이란 측면에서 6·25 전쟁을 재조명했다.

1952년 5월 일본에서 출격해 만조 작전(Operation High Tide)에 참가한 F-84E 전투기(뒤쪽)가  공중급유를 받고 있다.  미 공군 제공
 

공중급유기 6·25 전쟁서 첫 실전 무대

 


현재 공군은 전투기의 작전반경과 항공작전의 유연성을 더욱 높여줄 공중급유기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공중급유기의 첫 실전 무대가 66년 전 6·25 전쟁이었다는 사실은 아는 이가 드물다.

미 공군은 6·25 전쟁에서 최초로 실전 상황에서의 전술적인 공중급유에 성공했다. 미 7공군의 역사기록담당관에 따르면, 적 영토 상공에서 공중급유가 활용된 첫 사례는 1951년 7월 5일이다. 당시 일본 요코타 기지에서 출격한 미 43공중급유대대의 KB-29M 급유기는 북한 정찰 임무에 나선 91전략정찰대대의 RF-80A 슈팅스타 3대에 공중급유를 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슈팅스타의 작전 수행 가능 범위는 2배로 늘었고, 북한의 중요 표적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미 7공군은 공중급유가 전투작전에서 처음 사용된 사례 역시 1952년 6·25 전쟁 당시 만조 작전(Operation High Tide) 때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작전에서 116전투폭격비행단은 최대량의 미사일과 연료를 탑재하고 이륙해 공중급유를 받으면서 전투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미국·소련 등 강대국의 전투기 전력은 프로펠러기에서 제트기로 진화하고 있었다. 제트기는 프로펠러기와 비교하면 압도적인 속력을 과시했지만, 체공 시간은 오히려 짧았다. 더욱이 6·25 전쟁의 공중전은 주로 북한 지역에서 발생했다. 미그기 전력이 압록강 너머에서 바로 이륙해 작전반경이 짧았던 것과는 달리, 유엔 공군은 수원·강릉·여의도 기지, 혹은 일본에서 출격해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이러한 제한적 여건에서 공중급유기의 성능과 중요성이 실전적으로 검증된 것이다.

 

 

 

최초의 대규모 제트기 공중전

 


6·25 전쟁에서 최초의 대규모 제트기 공중전이 펼쳐졌다. 1951년 초부터 1953년 7월까지 북한 서북부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에서 치러진 미그 앨리(MiG Alley)의 공중전은 매우 격렬했다. 불과 60~80㎞의 공간에서 펼쳐진 이 혈투는 한반도 전역의 공중우세를 건 싸움이었으며, 미·소의 최강 전력이 자웅을 겨루는 챔피언전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제 최신식 후퇴익 제트기인 미그-15는 F-51 무스탕을 순식간에 재래식 항공기로 만들었다. 특히 속도가 느렸던 폭격기는 미그-15의 주요 먹잇감이었다. 순조롭게 공중우세를 확보하던 미 극동공군이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이에 미국도 최신 제트전투기를 한반도에 투입한다. 바로 F-86 세이버였다.

2년 넘게 미그 앨리의 전투는 계속된다. 결론적으로 이 싸움의 승자는 미군의 세이버였다. 미 극동공군은 전쟁 직후 14대1의 압도적 격추율로 세이버가 미그를 이겼다고 발표했다. 미그 810대를 격추하고, 세이는 단 56대만 잃었다는 주장이다. 이후 이 기록은 재평가됐지만, 7대1로 정도로 세이버가 우세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승패를 떠나, 미그 앨리의 혈투는 공중전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줬다. 전투기의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질수록 기총 공격은 효력을 잃어 갔고, 공대공 미사일 공격으로 공중전의 무게 중심이 옮겨졌다.

 

인민군의 전차 등 72%, 공군이 파괴

 

 

6·25 전쟁에서 항공력의 비중이 막대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이도 많다. 미 극동공군의 6·25 전쟁 당시 포로심문보고서는 ‘포로들은 전쟁 당시 파괴된 공산군의 트럭 가운데 80% 이상이 공군력으로 파괴됐다고 믿고 있다’고 기술한다. 트럭을 파괴했다는 것은 무기·탄약·식량을 없앴다는 의미다. 북한의 전투의지는 물론이고 먹을 것까지 모조리 앗아간 것이 공군이라고 지목한 것이다.

B-29 폭격기를 비롯한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한 유엔 공군은 인민군에게 ‘재앙’이자 ‘공포’ 그 자체였다. 미 극동공군의 보고에 따르면, 6·25 전쟁 발발로부터 1950년 11월 25일까지 최소한 3만9000명의 인민군이 항공기 공습으로 사망했다. 이는 남침 당시 북한의 지상군 전력의 절반에 달하는 수치다.

이 보고서는 무기별 적 전력 파괴 성과 분석을 통해, 인민군의 전차·트럭·화포 등의 72% 이상을 공군이 파괴했다고 평가한다. 인민군의 자랑이었던 T-34 전차도 전투기 앞에서 무력했다. 미 극동공군은 이 기간 북한 전차 전력의 75%에 해당하는 452대를 격파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공군력은 북한의 수송용 차량 6000대, 인민군의 보급로였던 철도와 교량 총 500여 개를 파손했다. 1950년 7월 인민군 일일 평균 보급량은 206톤이었다. 그러나 미 공군의 항공기가 공중우세를 장악하고 전선 후방을 휩쓸고 지나간 9월, 그들의 일일 평균 보급량은 21.5톤으로 격감했다.

 

 

미 극동공군, 인민군 보급로 초토화

 


한반도 전역에서 미 극동공군이 주도한 공중우세 상황은 한국을 수차례 위기에서 구한다. 첫 번째는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에 밀린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을 의지해 방어작전을 펼치고 있던 위태로운 시기에, 미 극동공군은 인민군 최전방 부대를 지원하는 후방 제대와 보급로를 초토화하는 방식으로 낙동강방어작전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보장했다.

두 번째로 공군은 중공군의 대대적인 참전으로 위기에 빠진 한반도를 구한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패망 직전에 몰려있던 북한군은 숨통이 트이고, 전선은 38선 이남까지 확대된다. 공군력은 이 기간에도 지속적인 근접항공지원작전과 후방차단작전으로 중공군의 남진 속도를 떨어뜨렸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했다. 이는 유엔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 것이기도 했다. 당시 중국 인민군 총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彭德懷)는 “만약 1950년 말 공세기에 중국군이 제공권을 가졌다면, 미군과 연합군을 한국에서 축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에도 공군력은 실질적이고도 심리적인 타격을 적에게 가해 전선을 안정시키고 정전을 성립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엔공군이 주도한 평양대폭격 작전이다. 폭격으로 불바다가 된 평양은 국군과 북한군에 각기 다른 상징적 의미를 줬다.

 

“조종사들의 목숨 건 ‘승호리 철교 폭파’ 그 자체가 하나의 신화”

[인터뷰] 이명환 박사

 


 


“공군력이 대한민국을 구했다? 제 대답은 메이비(maybe)가 아닌, 서튼리(certenly)입니다.”

전 공군사관학교 군사전략 교수이자 군사전문기자인 이명환 박사는 6·25 전쟁에서 공군의 영향력에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그는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개전 초기 공군력의 활약이 없었다면 낙동강방어작전 이후의 전쟁도 없었다. 6·25 전쟁의 구세주는 바로 에어 포스(Air Force)”라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을 하나의 신화라고 표현했다. 그는 “미 공군이 이 철교를 폭파하지 못한 것은 인민군의 대공방어망을 피하려고 적어도 8000피트 이상의 고고도에서 폭격했기 때문”이라며 “우리 공군은 목숨을 걸고 3000피트의 저고도로 근접해 눈으로 교각을 확인하고 때렸다”고 설명했다. 또한 “미 공군과 우리 조종사에게 전쟁의 무게가 같을 순 없었다. 그들은 임무 개념으로 한 소티를 수행한 것이고, 우리는 내 나라를 내 손으로 지킨다는 각오로 전장에 나섰다”고 덧붙였다.

또한 이 박사는 평양대폭격 작전과 351고지 작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시 유엔공군은 평양 일대를 총 45개 구역으로 구분해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이때 한국 공군도 2개 지역을 할당받았다. 미 공군이 한국 공군의 기량을 인정한 결과다. 351고지 작전은 대표적인 근접항공지원작전이다. 우리 조종사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이 지역의 지도는 지금과는 확연하게 달랐을 것이다.”

이 박사는 한국 공군의 전과에 대해 “낙동강방어작전 기간, L-4기는 399회의 정찰 임무와 230회의 연락임무를 수행, 유엔군의 화력을 필요한 곳에 유도하는 등 총반격의 기틀 형성에 일익을 담당했다”며 “F-51 전투기 인수 이후에는 전선 후방에서 적군 후속 제대와 보급품 집적소 폭격, 철도·도로 등 보급로 차단 등 막중한 전과를 올렸다”고 평했다.

마지막으로 이 박사는 “목숨 걸고 하늘을 날았던 한국 공군 조종사들의 정신은 그 자체로 유엔 공군이 올린 어떤 전과 못지않게 가치가 있다”며 “이것이 정신적인 유산으로 이어져 오늘의 대한민국 공군이 있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명환 박사는?

공사28기로 공군사관학교 군사전략 교수·교수부장을 역임했고, 독일 쾰른 대학에서 군사사학 박사를 취득, 현재 서원대학교 강의교수와 군사전문기자로 활약하고 있다.

김상윤 기자 < ksy0609@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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