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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육·해·공 합동작전…전쟁의 역사를 바꾸다

기사입력 2016. 06. 07   16:51

<44> 제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1944. 6. 6) (하)

최대의 인적·물적 자원이 투입된 ‘물량작전’

치밀한 계획·긴밀한 작전 역사 한페이지 장식

군수계통 종사자의 숨은 공로, 승리에 한 몫

 

 


 

 

 연합군 수뇌부들이 작전회의를 하고 있다.  필자 제공



무기와 무기체계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현대 세계 상륙작전의 전형(典型)이었다. 더구나 이는 역사상 최대의 인적·물적 자원이 투입된 물량작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열차 시간표’의 전쟁이었다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대차대조표’의 싸움이었다. 오늘날에는 일반용어이지만, 이른바 ‘군수 관리’라는 분야가 본격적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낸 작전이었다. 상륙작전에 필요한 무수하고 다양한 물품들을 착오 없이 조달, 작전수행이 가능토록 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치밀한 계획과 준비가 불가피했다.

또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현대판 합동작전의 전형이었다. 육해공군의 인원과 장비가 일거에 동원·투입됐다. 물론 이전에도 합동작전이 없었던 바는 아니지만, 이토록 육·해·공이 밀접하게 연결돼 작전을 수행한 사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최초였다. 물론 제1차 대전 시 영국의 육군과 해군이 야심적으로 시도한 갈리폴리 상륙작전(1915. 4)이 있었으나 이는 미흡한 사전 준비 및 이완된 작전지휘 탓에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더구나 이를 체계적 경영기법이 적용된 현대판 상륙작전의 효시로 보기는 어렵다.

제2차 대전 시에는 내세울 만한 해전이 없었던 반면, 간헐적으로 상륙작전이 시도됐다. 프랑스의 조기 항복으로 독일군이 유럽 대륙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대륙으로 진격하기 위해 상륙작전은 불가피했다. 전쟁사적 측면에서 상륙작전은 공격 진영에 엄청난 모험임이 분명했다. 속성상 상륙작전의 경우 근본적으로 방어 측이 유리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해안에 제대로 된 방어시설만 갖추고 있으면, 정말로 기묘한 기습작전이 아닌 경우 적의 상륙 시도를 수월하게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세기에 접어들어 상륙작전의 성공 가능성이 커졌다. 전함, 상륙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항공기 등을 총동원해 입체적으로 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륙작전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제해권을 장악해야만 했다. 그래야 상륙부대가 측방이나 후방에서의 기습공격에 대한 염려 없이 전심으로 해안을 향해 돌진할 수 있었다. 상륙지점에 근접하면 항공기와 전함을 이용해 적의 해안선 방어부대에 포격을 가하고, 이 틈에 아군 상륙부대를 상륙용 주정(Landing Craft)에 태워서 해안에 풀어놓을 수 있었다. 이어서 무사히 해안에 도착한 장병들은 적의 저항을 무력화하고 상륙지점에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로는 상륙전이 아니라 지상전으로서 일반 야전작전에서처럼 사격과 기동을 통해 적을 섬멸해야 했다.

실제로 연합군은 작전 실행 이전에 성능이 좋은 상륙주정(上陸舟艇)을 개발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끈질긴 실험 끝에 해상이나 해안가에서 기동성 있게 움직이고, 상륙작전 수행 중에는 적의 사격으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바닥이 평평한 상륙용 주정을 제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상륙주정이 일단 해안가에 도달하면 병력의 신속한 상륙을 가능케 해주는 전면개폐식 방탄트랩 개발에 성공했다.

본질적으로 이전 시대의 전쟁에 비해 제2차 대전 시에는 군 자체가 무척이나 복잡해졌다. 이를테면 1914년에 육군은 한정된 종류의 규격화된 무기로 무장한 보병이 주류를 이뤘다. 이들에게 필요한 병참 역시 철도 수송이나 차량의 단순한 왕복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제2차 대전 시 전투수행은 고도로 다변화됐다. 이때에는 각 단위 부대마다 무장력에 차이가 있었고, 기본적으로 동원해야 할 무기와 장비의 종류가 다양했다. 이를테면 소총 이외에 수류탄, 기관총, 박격포, 휴대용 대전차무기,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지뢰 등을 기본적으로 챙겨야만 했다. 당연히 상륙부대의 무장은 더욱 복잡했다.

일찍이 나폴레옹은 “전쟁의 승리는 결정적 지점에 최대한의 병력을 투입하는 자의 것이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입안자들은 작전의 성공 여부는 원활한 병참운용, 즉 독일군보다 얼마나 빨리 인원과 물자를 상륙지점에 투입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후 연합군은 총 33개 사단을 투입할 계획이었는바, 이를 위해 1일 평균 약 1만2000톤의 물자를 운송·하역해야만 했다.

사실상 거대한 계획의 필요성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제기됐다. 작전이 실행되는 1944년 한 해 동안 영국에 체류한 미군만 무려 150만 명에 달했고, 작전에 동원될 함정이나 항공기의 숫자는 차고 넘쳐났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기거할 군용 캠프에서부터 물자를 생산하고 보관할 창고시설, 항공기가 이착륙할 비행장 등으로 영국 남부지방의 항구와 도로는 항상 붐볐다. 역사상 어떠한 군대도 이처럼 사전에 치밀하게 작전을 입안하고 실행을 준비한 경우는 없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그 자체로 거대한 ‘군수관리체계’의 축소판이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원정군 수뇌부가 남긴 엄청난 분량의 서류에는 인원 및 물자와 관련된 각종 그래프, 도표, 통계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의미와 교훈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해 장기간에 걸친 치밀한 준비 끝에 1944년 6월 초에 단행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상륙 초반 예기치 못한 난제들에 직면하기는 했으나 대성공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었다. 어느 관련 영화의 제목처럼, 이는 막대한 육·해·공 전력 모두가 일거에 투입된 ‘지상 최대의 합동작전’이었다. 특히 동원된 인원보다도 단기간 내에 운송·보급된 엄청난 분량의 군수물자 측면에서 더욱 그러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투현장이 아니라 후방에 있었기에 역사적으로 별다른 조명을 받지 못한 군수(병참) 관련 요원들의 숨은 공로를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우리는 아이젠하워·몽고메리·패튼 등 군 지휘관들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으나, 이들의 뒤에서 막대한 군수물자를 생산·관리·운송·보급한 병참 분야 종사자들의 헌신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 요인인 사전에 치밀한 작전계획의 수립과 긴밀한 육·해·공 합동작전의 실행 이면에는 바로 이들 군수계통 종사자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 이처럼 특히 20세기 이후의 전쟁은 각자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에 더해 이러한 개별 역량을 효율적으로 조직 및 관리(경영)하는 측이 승리할 수 있음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보여준다.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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