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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속전속결 승리 쟁취 야심 ‘물거품’

기사입력 2016. 05. 17   16:56

<41> 제2차 세계대전: 미드웨이 해전 (1942. 6. 4) (상)

日, 미군기지·태평양함대 섬멸 작전

항공모함 5척·병력 11만5000명 출정

 

사전 정보 입수·대기하던 美공군

일본이 미드웨이 섬 공격하자 ‘폭격’

태평양전쟁 주도권은 ‘미국’으로

 

 



1904년 러시아 발트 함대와 벌인 쓰시마 해전에서 완승한 일본 해군은 이후 빠르게 전력을 강화했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일동맹을 빌미로 독일에 선전포고한 일본은 동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의 독일 식민지를 차지했다. 1921년 워싱턴 군축회담을 통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지속적으로 해군력 증강에 매진했다. 1931년 일본 관동군의 만주 점령과 이후 터진 중일전쟁(1937년)은 이제 일본 해군도 뭔가 중대한 일을 결행할 시점에 이르렀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적으로 공격, 태평양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이어서 남태평양으로 외연 확대를 시도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의 태평양함대를 유인해 격멸코자 시도한 것이 바로 미드웨이 해전(Battle of Midway, 1942. 6. 4)이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기대와 달리 전쟁의 주도권이 미국으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됐다.


역사적 배경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침략전쟁이 계속되자 그동안 꾸준히 일본의 자제를 요구해온 미국은 이제 더 이상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1940년 9월, 고철(古鐵)의 대일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금수(禁輸) 조치는 점차 확대돼 항공기 엔진 및 다른 자원으로까지 확대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핵심 자원의 부족을 느끼기 시작한 일본은 이를 해결할 목적으로 1941년 7월 인도차이나 반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에 대응해 미국은 자국 내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대일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향후 전쟁 수행에 긴요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선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더 남쪽으로 확대해야만 했는데, 이럴 경우 자칫하면 미국과의 전쟁도 각오해야만 했다. 일본 정부와 군 수뇌부는 무엇인가 결단을 내릴 시점이 왔다고 인식했다.

우선, 미국 정부에 외교협상을 제안하면서 화해의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미국은 궁극적으로 중국 대륙에서의 일본군 철수를 요구했다. 일본이 난처함을 표명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향후 미국은 민주국가들을 지원하는 병기창의 역할’을 할 것임을 천명하는 등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일본 내의 호전적 여론이 들끓었고, 일본 대본영과 군부는 본격적으로 미국과의 일전(一戰) 준비에 돌입했다. 하지만 문제는 미국과 국력을 비교할 경우, 일본이 결정적으로 열세한 상황이었기에 단기결전(短期決戰)만이 그나마 승리를 담보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떠올랐다.



전개 과정

마침내 일본은 1941년 12월 1일 열린 최종 어전회의에서 미국·영국·네덜란드를 상대로 개전할 것임을 정식으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일본 해군은 1941년 12월 7일(일요일) 이른 아침에 미국의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있던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이보다 한 시간 전에 일본 육군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벗어나 말레이 반도에 상륙했다.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운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바야흐로 ‘태평양전쟁’이 불붙었다.

일본이 자랑하는 아카기 등 6척의 항공모함에 420여 대의 항공기를 탑재한 일본 해군은 드넓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진주만으로 접근, 당일 오전에 기습 공격을 가했다. 레이더 담당 장교의 태만으로 급습을 당한 미 해군의 진주만 기지는 한마디로 쑥대밭이 됐다. 두 차례에 걸친 공중공격을 통해 일본 공군기는 비행장에 있던 미군 항공기의 대부분과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미군 구축함 대부분을 격침했다. 일본 공군의 피해는 미미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일본어로 ‘호랑이’를 의미하는 ‘도라! 도라! 도라!’라는 기습 성공을 의미하는 암호가 일본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제독에게 타전됐다. 당연히 이 소식을 접한 일본 열도는 환희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열광의 이면에서 불안한 어두운 그림자가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본군에는 불행하게도, 그리고 미군에는 다행스럽게도 진주만 공격에서 미 해군의 주력함인 세 척의 항공모함(엔터프라이즈·렉싱턴·새러토가)은 다른 기동훈련에 참가하느라 당일 진주만에 없었던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야마모토 제독이 우려했듯이, 막대한 자원을 갖고 있는 잠자는 거인을 일순간에 깨우고야 말았다. ‘진주만을 기억하라’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호소에 전 미국인이 일치단결해 열정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일본의 승전 열기는 말레이 반도와 필리핀을 비롯한 남태평양 지역에서 일본 육군이 연전연승하면서 지속됐다. 그런데 1942년 4월 중순 어느 날 이러한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두리틀(J. H. Doolittle) 중령이 이끈 미군의 장거리 폭격기(B-25) 16대가 항공모함 호닛함에서 출격해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를 비롯한 몇몇 중요 도시들을 폭격했던 것이다.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주변 방어선을 확대해 일본 본토의 안전을 도모하고, 동시에 진주만 기습에서 살아남은 미 태평양함대의 주력을 유인해 격멸할 심산으로 하와이 북서쪽 1800㎞ 지점에 있는 미드웨이 섬 점령작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 섬의 미 해군 전초기지에서 이륙한 정찰기가 하와이로 접근하려는 일본군의 작전행동을 조기에 경보할 수 있었기에 일본군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미드웨이는 폭이 불과 10㎞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작은 환초(環礁)였으나 당시 그곳에는 미 공군 비행장과 소수의 미국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마침내 1942년 5월 항공모함 5척 이외에 수많은 함정과 병력 11만5000명으로 편성된 일본연합함대가 그 위용을 뽐내면서 태평양을 건너서 출정했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 해군의 제삿날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짐작조차 못 했다. 출정한 일본군은 자신만만했지만, 이들의 예상과 달리 미군은 사전에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해 적의 작전을 손금 보듯이 읽고 있었다. 미 해군은 일본 해군이 미드웨이 섬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이 미드웨이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자 대기하고 있던 미 공군의 어뢰 탑재기가 일본 함정의 머리 위로 나타났다. 부랴부랴 출격한 일본군 전투기들이 가까스로 미군기들을 격퇴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일본 항공모함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폭격기들이 대함용 고성능 폭탄을 장착하고 있을 때, 구름 위에 숨어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미 공군기들이 벌떼처럼 몰려와서 항공모함에 폭격을 가했다. 고성능 폭탄이 폭발하기 시작하면서 일본군 항공모함은 일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출동한 4척의 항공모함 중 3척이 폭발로 침몰했다.

이에 비해 미군은 한 척의 항공모함(요크타운함)만을 잃었을 뿐이었다. 물론 항공기도 일본군은 거의 2배에 달하는 피해(일본군 250대 vs 미군 147대)를 보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억할 것은 이날 이후로 태평양의 주인이 다시 미 해군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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