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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트인 우리 옛땅 요동 벌판에 선 연암 “아~신생아처럼 울고 싶구나”

입력 2016. 04. 2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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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참 좋은 울음터!


어머니 배 속에서 나온 갓난아기의 울음에 비유하며

인습에 갇혔다 꿈의 세계 만난 자신의 분노·환희의 표출이자

고구려 땅 회복 의지 함께 표현

 

 


 

 

 

 


청석령을 지나며

1780년 8월 5일 오전, 연암 박지원은 사절단 대표와 함께 가마를 타고 통원보를 출발했다. 30여 명의 하인이 벌거벗은 채 가마를 메고 산골 개울을 건널 때는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했다. 점심을 먹은 곳은 통원보에서 12㎞쯤 떨어진 초하구였다. 조선인에게 답동(畓洞)이라고 불렸던 이 고을에 대해서 연암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곳은 언제나 물에 잠긴 습한 땅이므로 우리나라 선조는 답동이라고 불렀다. 답(畓)이란 한자는 원래 없는 글자인데, 우리의 옛 지방관헌들이 장부를 정리할 때 밭 전(田) 자 위에 물 수(水) 자를 얹어놓고 뜻은 ‘논’으로 정하고, 발음은 ‘답’이라고 했다.”

이날 연암은 답동에서 12㎞를 더 이동해 연산관에서 숙박했다. 밤에 그는 꿈을 꿨다. 번화한 심양의 모습을 구경한 후 하늘을 날아 고향에 가서 형님에게 자랑한다. 그리고 다시 사절단 일행에 합류하려고 하지만, 길이 막혀 잠꼬대하며 애를 태우는 꿈이었다. 천진난만한 어린애 같은 43세 연암의 꿈 이야기에는 티 없이 맑은 그의 영혼이 드러나 있다.

8월 6일 오전, 길을 떠난 연암은 말 타고 냇물을 건너다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후, 마운령을 넘어 첨수참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찌는 듯한 더위 속에 청석령을 넘었다. 이 고개는 1637년 청나라군에 의해 인질로 끌려가던 봉림대군이 애끊는 시 한 수를 남겼던 곳이다. 참고로 봉림대군은 8년 만인 1645년 귀국했으며, 1649년 국왕(효종)으로 즉위했다.



청석령 지나노니, 초하구는 벌써 까마득하네.

되놈 땅은 바람도 찬데 궂은비마저 내리누나.

누가 내 모습 그려서 임 계신 곳에 전해줄까?


청석령 고갯마루에는 영험하다는 관제묘가 있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서로 다투어 머리를 조아리며, 참외를 바치기도 하고, 향 피우고 제비를 뽑아 점치는 것을 보며 연암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청나라 인질로 끌려갔던 봉림대군이 22세 때인 1641년 장모에게 보낸 서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893년 영국 화가가 그린 청나라 군사.  필자 제공

 

 

 

호곡장론

8월 7일 새벽, 연암은 사절단 대표와 함께 가마를 타고 전날 숙박했던 낭자산을 출발했다. 16㎞를 지나 냉정(冷井)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다시 4㎞쯤 이동해 산기슭을 벗어났을 때였다. 앞서 가던 정 진사의 마부가 달려와서 저 멀리 7세기 중엽에 지어졌다는 백탑(白塔)이 보인다고 호들갑을 떤다.

연암의 눈에 백탑은 아직 보이지 않고, 한없이 너른 평원에 신기루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문득 삶이란 의지할 곳 없이 하늘을 머리에 인 채 땅을 밟고 떠도는 것임을 깨달은 연암은 무의식중에 손을 이마에 얹고 소리쳤다.

“참 좋은 울음터(好哭場: 호곡장)로다. 소리 내어 통곡할 만하구나.”

옆에 있던 정 진사가 통곡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연암은 그 유명한 ‘호곡장론(論)’을 펼친다. 옛날 영웅들은 잘 울었고 아름다운 여인도 눈물이 많았다지만, 그 울음소리는 쇠나 돌에서 나오는 것처럼 천지를 가득 채우지는 못했다면서 울음에 관한 강연을 시작한 것이다.

“사람에게는 일곱 가지 감정(七情: 칠정)이 있다지 않소. 우리는 그중에서 슬픔만이 울음을 유발할 뿐, 나머지 여섯 감정도 울음을 자아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소이다. 인간은 기쁨이 극에 달해도 울고, 분노가 치밀어도 웁니다. 즐거움에 겨워도 울고, 사랑이 넘쳐도 울지요. 증오가 한계에 달해도 울고, 욕심이 과해도 웁니다.”

이어 연암은 가슴에 응어리진 일곱 가지의 감정을 풀어버리는 데는 번개와 천둥처럼 큰 소리로 통곡하는 것만큼 빠른 방법은 없다며 진정한 울음의 의미를 말한다.

“사람들은 누군가 죽어서 초상을 치를 때면 마음에도 없는 ‘아이고’ 어쩌고 하며 억지로 쥐어짜는 소리를 내뱉지요. 그러나 진심으로 일곱 가지 감정에서 나오는 진짜 음성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쌓이고 응어리져 있어도 스스로 억제하고 견뎌서 감히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법이라오.

그런데 기원전 2세기에 살았던 중국의 가생(賈生)이라는 정치·사상가는 자신의 간언(諫言)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통을 견디다 못해 큰 궁전에서 크게 울부짖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소이다.”

이에 정 진사가 넓은 울음터에서 우는 이유가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 중 어느 것에 해당하느냐고 묻자, 연암은 대답한다.

“갓난아기에게 물어봅시다! 태어나서 무슨 감정을 느꼈겠소? 처음으로 해와 달을 보고, 다음에는 부모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친척들도 보게 될 것이오. 이런 기쁨과 즐거움을 늙을 때까지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르니 마땅히 즐거워하고 웃어야 할 겁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분노와 설움이 가득 찬 표정으로 한없이 울부짖는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갓난애가 태어난 것을 후회하고 스스로 통곡하며 애통해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잘났거나 어리석거나 인간은 죽기 마련이며, 사는 동안 실수하고 죄를 짓고, 근심과 걱정이 끊이지 않을 것을 예감해서 첫울음을 터뜨린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는 갓난애의 본심과는 크게 어긋나는 말이오.

태아는 엄마 배 속에서는 캄캄하게 막혀서 짓눌려 지냅니다. 그러다 넓고 훤한 곳으로 빠져나와서 손발을 펴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가슴이 탁 트이니 저도 몰래 참된 소리를 내어 감정을 남김없이 쏟아내는 것이지요.

이곳 요동 벌판에서 산해관까지 480㎞는 사방에 산도 없고, 하늘과 땅끝을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 예나 지금이나 넓고도 푸른 하늘을 비와 구름이 오갈 뿐이오. 그러니 갓난아기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 한바탕 울어볼 만하잖소?”

연암이 요동 벌판에서 통곡하고 싶었던 것은 원대한 뜻을 펴지 못한 채 서른세 살의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중국인 가생과 신생아의 첫울음인 고고성(呱呱聲)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것은 인습의 굴레에 갇혔다가 꿈의 세계를 만나는 연암의 분노와 환희의 표출이었다. 또한, 그것은 빼앗긴 겨레의 땅과 실추된 국가 위신을 되찾아야 한다는 간절한 욕망이기도 했다.

<이헌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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