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열하일기로 배우는 나라사랑

‘관찰자’ 연암의 눈에 ‘작고 하찮은 것’은 없었다

입력 2016. 04. 1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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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열하일기는 관찰 보고의 교과서


“꽃·풀·나비 수놓은 신발 신고…”

통원보에서 만난 모녀

옷차림서부터 행동까지 묘사

결혼 행렬과 구들 놓는 법 등

마치 고성능 카메라로 찍듯

민중의 삶 생생하게 기록

 

 

 


 


송참과 설례참에 담긴 비밀



‘설례참’ 표지석. 필자 제공

 

 

 

연암 박지원은 1780년 7월 29일 밤을 송참(松站)에서 묵었다. 송참은 우리 선조가 사용했던 명칭이고, 중국인은 이곳을 설류참(薛劉站)이라고 불렀다. ‘참(站)’은 공무 수행을 위한 숙식과 교통·통신의 편의를 제공하고 사신을 접대했던 역참을 일컫는데, ‘열하일기’에는 ‘송점’ 혹은 ‘설류점’처럼 가게나 여관을 의미하는 ‘점(店)’으로 표기되었다.

설류참이란 지명은 당나라 장군 설인귀와 유인원의 성에서 따온 것이다. 설인귀는 668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지휘관이었다. 유인원은 660년 백제의 멸망을 주도했던 지휘관이었으며, 그 이전에는 요동의 고구려 땅을 침략했던 자다. 설류참은 바로 중국의 고구려 침략을 위한 전초기지였다.

설류참의 현재 명칭은 설례촌이고, 그곳에는 제작연대가 불분명한 설례참(薛禮站)이란 표지석이 있다. 또한, 설인귀의 본명이 설례(薛禮)다. 언제부턴가 중국인이 우리 연행록에는 보이지 않는 설례촌 혹은 설례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궁금하다. 설인귀가 전쟁에서 세운 공로를 유인원의 그것보다 높이 평가해서일까? 아니면 다른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일까?

송참에는 명나라 때 조선인이 심었다는 소나무 두 그루가 19세기 말까지 수백 년 동안 살아있었다고 한다. 소나무는 한반도에 가장 널리 분포돼 있으며, 그 숫자도 제일 많다. 따라서 요동에서 한 쌍의 노송(老松)을 본 우리 사신들이 향수에 젖고, 중국 이름 대신에 송참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후 송참을 찾는 조선의 참선비들은 영광과 통한의 우리 역사를 새삼 떠올렸다. 기원전 1세기에 건국한 후 700년 동안 동북아시아 최강의 군사 강국으로서 만주(요동) 지역을 지배하고, 7세기에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규모 침략을 여섯 차례나 당당히 물리쳤던 영광의 고구려 역사를!

당나라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신라, 사리사욕에 눈이 먼 정치지도자들 때문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자멸해버린 백제와 고구려, 당나라에 끌려갔던 국왕을 비롯한 수많은 백제인과 고구려인의 비참한 운명,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넓은 대륙의 영토를 빼앗겨버린 치욕스러운 역사를!


1895년 미국인의 저서 ‘조선의 게임’에 수록된 지패(투전) 놀이 그림. 필자 제공

 

 

 

통원보에서 엿새를 지내다

1780년 7월 30일 연암은 송참에서 20㎞ 거리의 통원보(通遠堡)에 도착했다. 그런데 7월 31일 새벽부터 시작된 큰 장맛비로 8월 5일 오전까지 엿새나 이곳에 발이 묶였다. 그동안 소일거리는 지패(紙牌) 놀이였다. 연암은 잡기는 즐기지 않았으나 나름의 실력은 갖췄던 것 같다. 이때 사흘간 놀이판에 어울렸으며, 이 중 하루는 판돈을 싹쓸이하기도 했다.

지패는 투전(鬪전)이라고도 하며 한지에 콩기름을 먹여서 빳빳하게 만든 ‘목(目)’의 한쪽 면에 그림이나 글자를 끗수로 그려 넣은 것이다. 연암이 살던 때는 지패의 한 벌이 여든 개의 목으로 돼 있었다. 또한, 목에 수를 놓듯 잘 그리는 사람 혹은 지패의 고수를 ‘타자(打子)’라고 불렀는데, 이는 현재 사용되는 ‘타짜’의 어원이다.

7월 31일 연암은 첫 번째 지패 놀이에는 끼지 못하고 구경하는 신세였다. 그러니 연암의 귀에는 놀이판의 떠드는 소리보다 벽을 통해 간간이 새어 나오는 꾀꼬리 소리처럼 가냘프고 앙증맞은 여인의 목소리가 훨씬 또렷이 들렸다.

매혹적인 주인집 처녀일 것이라는 기대감에 연암은 담뱃불을 댕기는 척하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웬걸 나이가 쉰도 넘어 보이는 사납고 볼품없는 부인이 방문 쪽 평상에 앉아있는 게 아닌가? 부인의 인사말에 성의 없이 대꾸한 후, 연암은 재를 뒤적이는 시늉을 하면서 곁눈으로 그녀의 모습을 관찰했다.

“머리칼을 꽃으로 빈틈없이 장식하고 금비녀로 쪽을 쪘으며, 얼굴에는 연지를 엷게 바르고, 귓불에는 푸른 옥 귀걸이를 달았다. 몸에는 긴 검정 옷을 걸쳤는데, 옷에는 은 단추가 촘촘하게 달렸다. 발에는 꽃·풀·벌·나비를 수놓은 신발을 신었다. 전족하지 않고, 가죽신을 신지 않은 것을 보니 만주족일 것이다.”

이어서 부인의 딸도 연암의 눈에 부착된 고성능 카메라에 잡혔다.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아가씨가 구슬로 엮은 발[簾]을 젖히며 나온다. 머리를 양쪽으로 갈라서 위로 틀어 올린 것으로 미루어 미혼일 것이다. 얼굴은 어미처럼 엄청나게 사납게 생겼으나, 통통한 살결이 희고 깨끗하다.

처녀는 녹색 질그릇에 담긴 수수밥을 쇠 냄비에다 수북이 담고 물을 부은 다음, 의자에 걸터앉아 젓가락으로 식사한다. 반찬은 60㎝나 되는 파를 된장에 찍어 먹는 것이 전부다. 목에 달걀만 한 혹이 달린 그녀는 조금도 수줍은 기색 없이 밥 먹고 차를 마신다. 해마다 조선 사람을 보아서 낯이 익기 때문일 것이다.”


지패(투전).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이처럼 연암은 한순간도,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관찰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었으며, ‘열하일기’는 그런 관찰 보고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8월 1일 그는 돼지가 수수밭에서 총을 맞고 끌려가는데도 그 주인이 찍소리 못하는 것을 목격한다. 짐승이 남의 밭에 들어가서 농작물에 피해를 주었을 때는 그 짐승 주인이 엄한 처벌을 받는 청나라 제도가 ‘열하일기’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8월 2일에는 결혼 행렬을 구경하고 관찰한 내용을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했다. 이어 책을 빌려보기 위해 청나라 학자를 찾았으나, 청심환과 부채를 주면 도서 목록을 주겠다는 말을 듣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아니꼽지만 결국에는 청심환과 부채를 보내주고 책자 목록을 받아 베껴두었다.

8월 4일에는 청나라의 구들 놓는 방법을 관찰하고, 우리나라 온돌에 적용하면 좋겠다는 주장을 기록으로 남겼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교사절의 중요 의무는 관찰 내용의 보고다. 이는 국민 세금으로 외국을 시찰하는 국민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연암처럼 실용적인 보고서를 남기는 분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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