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열하일기로 배우는 나라사랑

크기별로 진열된 술잔 보고 ‘이용후생’ 참의미 깨닫다

입력 2016. 03. 3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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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올바른 도덕은 물건을 제대로 쓰는 것


우연히 간 청나라 변방 술집 여러 종류의 술잔 보고 감탄

“물건 이롭게 써야 넉넉해지고 넉넉해야 바른 도덕 갖겠구나”

 

 

1793년 영국 사절단을 마중 나왔던 청나라 장군.  필자 제공

 

 

 



청나라 땅을 밟다

1780년 7월 28일 오전, 책문 밖에서 대기하던 조선 사절단 대표는 청나라 황제의 특명을 받은 어사와 동북지역사령관이 책문 안의 출입국관리청사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열하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공식 사절 세 명이 그간의 행적을 조정에 보고하는 문서를 본국으로 되돌아가는 의주의 병사들 편에 부치고, 차례로 책문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이 문으로 들어가면 중국 땅이니, 바야흐로 고향과의 소식이 끊어질 참이다. 나는 마음이 아파 한참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다가 몸을 돌려 천천히 책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연암을 비롯한 사절단 일행은 압록강을 건너서 약 50㎞ 거리에 위치한 책문의 안쪽을 중국 땅으로 생각했다. 바꿔 말하면, 책문 밖의 요동은 우리 땅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200여 년 후 요동은 고사하고 휴전선을 경계로 살아가는 우리를 보면서 연암은 저세상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의(御醫)와 그의 마부인 대종을 길동무 삼아 책문 안을 둘러보는 연암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온다. 사람 사는 가구는 고작 20~30호인데, 집들이 모두 높고 웅장하다. 그들이 울창한 버드나무 숲 속에 우뚝 서 있는 파란색 주막 깃발 하나를 발견하고 서로 마음이 끌려 들어가니 먼저 자리 잡고 떠들던 조선의 마부와 하인들이 재수 없다는 듯이 피해서 나가버린다.

술집 주인은 눈치 없이 영업을 방해한다며 어의에게 화를 퍼붓는다. 이때 중국에 벌써 예닐곱 번 드나들었던 마부 대종이 달변으로 주인을 설득한다.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연암은 다시 한번 천한 마부의 사교적인 역량에 감탄한다.


박지원의 한글판 ‘열하일기’.
 명지대학교 소장

 

 


변방의 술집은 또 하나의 배움터

청나라 변방의 술집은 연암에게 술꾼이 그저 돈 내고 술 마시며 회포를 푸는 장소가 아니라 또 하나의 배움터였다.

“탁자 위에는 놋쇠와 주석으로 만들어진 은빛 술잔들이 다양하다. 잔들은 각기 37.5㏄에서부터 375㏄ 분량의 술을 담을 수 있도록 크기별로 배열됐다. 그러니 술의 양을 두고 시비가 붙을 일이 없다. 술집 기물들의 놓인 모습은 하나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다. 소 외양간이나 돼지우리까지도 짜임새 있고, 심지어 퇴비나 똥구덩이도 그림처럼 곱고 정교하다.”

채 30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술집을 답사한 후, 연암은 위선적인 조선 사대부들이 넋두리하듯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진정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쉽게 정리했다.

“아하, 물건을 쓸모 있게 쓰는 ‘이용(利用)’이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물건을 이롭게 사용해야만 생활을 넉넉하게 만드는 ‘후생(厚生)’이 가능하겠구나! 생활이 넉넉해진 후라야 국민에게 올바른 도덕을 갖도록 하는 ‘정덕(正德)’에 이를 수 있겠구나! 그렇다! 물건을 쓸모 있게 사용할 줄 모르면 국민의 생활은 결코 넉넉해질 수 없을 것이다. 국민이 넉넉한 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들에게 올바른 도덕을 갖도록 할 수 있겠는가?”

홍대용의 한글판 ‘담헌연행록’.
 숭실대학교 소장

 

 



봉황산 구경

입국 절차를 마친 조선 사절단 일행은 책문 안의 민가에 숙소를 정하고 점심 식사를 했다. 이후 연암은 두 명의 동료와 함께 2∼3㎞ 거리에 있는 봉황산으로 향했다. 이날 아침 오는 길에 멀리서 북한산과 산세를 비교했던 바로 그 산이다.

연암은 봉황산의 옛터와 성벽이 안시성의 유적이라는 소문을 들었으나, 규모를 보니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그저 고구려의 작은 보루(堡壘)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봉황산을 구경한 후 버드나무 아래서 더위를 식히던 연암은 마침 곁에 있는 벽돌로 쌓은 우물을 유심히 살폈다.

“우물 위에는 큰 돌을 다듬어서 만든 뚜껑이 덮여 있다. 사람이 빠지지 않고 먼지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뚜껑의 양쪽에 구멍을 뚫어서 겨우 두레박만 드나들게 해놓았다. 이는 물의 본성이 음(陰) 하기 때문에 뚜껑으로 태양을 가려서 물을 살아있게 하기 위한 방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물 지붕에는 도르래를 만들어 양쪽에 두 가닥의 줄을 달아놓았다.”

연암은 우물만이 아니라 두레박, 물을 나르는 통, 물통을 어깨에 메는 멜대(扁擔: 편담) 등이 조선의 그것들과 비교해 실용적이라는 사실도 강조했다.



봉황산. 필자 제공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연암의 편견

1780년 7월 29일 새벽, 연암은 어의와 함께 남들보다 먼저 책성에서 12㎞ 거리의 봉황성을 향해 떠났다. 길 안내는 말솜씨와 수완이 뛰어난 마부 대종이 맡았다. 삼복더위로 옷이 땀에 흠뻑 젖은 채 연암은 중국인 집에서 아침 식사를 했는데, 대종의 주선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한족(漢族)인 주인은 양금을 잘 타는 미남 청년이었으며, 집은 호화로운 가구와 화초 등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연암의 관심은 그런 겉모습이 아니라 젊은 집주인의 학식이었다. 사서(四書)를 외웠으나 강의(講義)는 듣지 못했다는 그의 대답을 듣고, 연암은 중국과 조선에서의 글공부 방법의 차이를 생각했다.

“조선에서는 처음부터 사서의 음과 뜻을 함께 배우는데, 중국에서는 처음에 입으로 외우는 송서(誦書)를 한다. 그 후에 스승의 ‘강의’를 듣고 뜻을 배운다. 따라서 중국인은 죽을 때까지 강의를 듣지 못하더라도 머릿속에 외워둔 문장을 일상생활에 사용하며 이것이 표준말이 된다. 따라서 중국어는 세계에서 가장 쉽고 이치에 맞는 언어다.”

또한 ‘열하일기’ 중 ‘피서록(避暑錄: 피서 산장에 머물며 기록한 글)’에는 조선은 말이 먼저이고 글자가 나중이지만, 중국은 글자가 곧 말이 되므로 중국어가 우수하다는 언급도 보인다. 많은 조선의 사대부들처럼 연암도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글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그릇된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연암의 절친한 친구 홍대용의 연행록이 한문만이 아니라 한글판으로도 남았듯이, 연암의 ‘열하일기’도 그의 생전에 누군가 베껴 쓴 한글판의 일부가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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