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열하일기로 배우는 나라사랑

“청의 봉황산은 높고 아름답지만 기운은 우리 삼각산에 못 미치네”

입력 2016. 03. 1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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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자랑스러운 우리 강산


연암, 풍수지리 맹신하지 않았지만

산수 보는 혜안 가져

“우리 한양은 억만 년을 누릴

용이 서려 있고 범이 앉은 형세”

도봉산과 삼각산의 비범함 자랑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전도’(국보 제217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청나라 화가가 그린 황해도 평산도호부의 총수. 
 중국 민족도서관 소장



요동의 총수(총秀) 역사적으로 우리 땅



연암 박지원은 1780년 7월 27일 저녁 총수에 도착해 하룻밤을 지새웠는데, ‘열하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구련성을 떠나 12㎞를 가서 금석산 기슭에 앉아 점심을 먹고, 다시 12㎞를 더 이동하여 총수에서 야영했다. (중략) 총수에 도착한 것은 날이 저물어서였다. 이곳은 우리나라 황해도 평산(平山)의 총수와 흡사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총수라고 이름을 지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윗글에서 금석산은 우리 조상의 연행록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지만, 오늘의 지명이 무엇이냐에 대해선 의견이 갈린다. 혹자는 오룡산이라 하고, 혹자는 송골산이란다. 이와 관련, 1803년 중국을 다녀온 익명의 선비가 집필한 ‘계산기정’이란 책에서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금석산은 산세가 높고 험하며 금과 돌이 섞인 듯하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크기는 우리나라 관악산과 비슷하나, 더 아름답다. 이 산의 오른쪽에는 수목이 우거진 송골산이 있는데, 임경업 장군이 이 산에 국경을 경비하기 위해 봉수군(烽燧軍)을 두고 의주를 지켰다.”



이 글에서 금석산은 송골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이 송골산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병사를 배치해 국경 수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과, 이곳이 우리 영토이자 의주부 소속이었음도 알 수 있다.



총수는 황해도 평산도호부의 관할하에 있던 고을의 지명이다. 아름다운 총수산과 구슬처럼 맑은 개천이 흐르는 마을이어서 총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다. 그 지명과 관련해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기로 하자.



“총수는 평산에서 북쪽으로 12㎞ 지점에 있다. 이곳에 총수산(聰秀山)이 있는데, 1488년 명나라 사신 동월이 이곳을 지나다가 동행하던 조선의 이조판서 허종에게 귀가 밝다는 뜻의 ‘총(聰)’ 자보다는 산의 봉우리가 푸른 파처럼 깎였으니 파를 의미하는 ‘총(蔥=총)’ 자로 대체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여 한자 표기가 총수(총秀)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계산기정’은 총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저녁에 총수에 도착했다. 산에 가파른 바위벽이 서 있고 샘이 둘러 있는 모습이 마치 황해도 평산을 지나는 것과 같았다. 명나라 사신 예겸이 1450년 우리나라에 와서 평산도호부 총수의 바위와 물이 이곳과 유사한 것을 보고, 총수라는 이름을 빌려서 이 고을의 이름으로 삼았다.”



이렇게 조선 사절단은 금석산과 총수를 지나면서 역사적으로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나라사랑의 마음을 다졌다.

 

명나라 사신 예겸 초상화.
 네이버 지식백과

 

 

청나라 병사들(18세기 말 영국 화가의 스케치). 필자 제공

 


조선과 청나라 병사의 국경 수비



연암 일행은 1780년 7월 28일 아침 일찍 총수를 떠나 책문으로 향했는데, 길에서 5~6명의 청나라 병사들과 마주쳤다. 당나귀를 타고 국경을 지키러 가는 이들은 창백한 얼굴에 남루한 옷을 입어 군인으로서의 기품이 없어 보였다. 연암은 “우리나라는 장병들이 국경 수비에 충실하여 염려되는 것이 없으나, 청나라는 너무도 허술하다”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조선의 마부들이 청나라 병사들을 놀려 먹을 정도였다. 마부들이 그들에게 나귀에서 내리라고 호통을 치고, 이에 불응하는 병사의 말채찍을 빼앗아 종아리를 후려갈기면서 꾸짖었다. 황제에게 드릴 토산물을 가지고 가는 사절단 앞에서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청나라 병사들은 땅바닥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 이마가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도록 사죄하고 나서야, 물러갈 수 있었다. 연암은 마부들의 사나운 행동에 대해서 우려하지만, 그들이 먼 여행길에 무엇으로 심심풀이하겠느냐며 웃어넘긴다.


봉황산과 삼각산



연암은 점괘·풍수지리 등을 맹신하지 않았지만, 산수를 보는 혜안을 가졌던 인물이다. 조선과 청나라의 실질적인 국경이었던 책문에 가까이 이르자, 그는 멀리 보이는 봉황산을 바라보며 그 모습을 평했다.



“땅에서 뽑아낸 듯한 바위 모습이 마치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세운 듯하구나. 연꽃 봉오리가 반쯤 피어난 듯하고, 한여름 하늘가에 떠도는 뭉게구름처럼 기이한 자태로다.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지만, 맑고 윤택한 기운이 모자라는 것이 흠이로다.”



그러면서 그는 문득 서울의 도봉산과 삼각산의 산세가 금강산보다 낫다면서, 나름대로 해석을 내놓았다.



“금강산 1만2000봉은 하나같이 기묘하고, 높으며, 웅장하고, 그윽하지 않은 것이 없다. 짐승들이 붙잡은 듯, 새들이 날아가는 듯, 신선이 공중으로 솟는 듯, 부처가 가부좌한 듯, 음산하고 적막함이 마치 귀신의 굴속과 같다.



단발령에 올라가서 마침 석양을 받아 끝없이 푸른 가을 하늘에 솟은 금강산을 바라보았으나, 산이 창공에 닿을 만큼 빼어난 빛과 제 몸에서 우러난 윤기와 자태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긴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강 상류에서 배를 타고 내려오다가 강어귀에 내려서 서쪽의 한양을 바라보니, 삼각산의 파란 봉우리들이 모두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 있었다. 봉우리들은 흐릿한 안개와 맑은 아지랑이가 서린 채 밝고 고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남한산성의 남문에 앉아서 북쪽의 한양을 바라보니 마치 물에 비친 꽃과 같고, 거울에 비친 달과 같았다.



어떤 사람은 이를 ‘공중에 떠 있는 맑은 바람 혹은 왕성한 기운(旺氣: 왕기)이라면서 곧 왕의 기운(王氣: 왕기)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 서울은 실로 억만 년을 누릴 용이 서려 있고 범이 걸터앉은 형세라고 할 수 있고, 도봉산과 삼각산의 신성하고 밝은 기운은 평범한 산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



삼각산(북한산)의 비범한 기운과 수도로서 한양의 왕성한 기운에 관해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은 연암은 봉황산의 높고 빼어난 산세가 비록 도봉산과 삼각산의 그것을 능가할지 몰라도, ‘공중에 떠 있는 왕성한 기운’에 있어서는 한참 못 미친다고 결론지었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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