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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피지배층 화합 잔치? 정복자의 세력 과시였을 뿐

입력 2016. 03. 16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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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만한전석의 진실


건륭황제 초상화

 

 

 

 






중화(中華)라는 이름의 중국은 주변국에 어떤 나라일까? 역사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중국은 국운의 성쇠에 따라 대내외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왔다. 음식을 통해서도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전통적으로 중국은 요리로 외교를 펼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국의 본질을 엿볼 수 있는 요리 중 하나가 만한전석(滿漢全席)이다.




중화요리의 집대성…108가지 산해진미



중화요리를 집대성했다는 ‘만한전석’은 먹어본 적은 없어도 대부분 한번쯤 들어봤을 이름인데, 청나라 황제가 지배계층인 만주족과 피지배 계급인 한족 관리의 화합을 위해 베푼 잔치로도 널리 알려졌다.

만한전석은 청나라 때 만주족과 한족의 진귀하고 다양한 음식을 모두 모아 차린 잔칫상 이름이다. 보통 108가지 산해진미가 나오고, 최고로 많이 차렸을 때는 전채와 후식으로 먹는 딤섬까지 포함해 무려 300종류가 넘었던 적도 있다. 그 때문에 하루에는 도저히 다 먹지 못해 사흘에 걸쳐서 먹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만한전석에는 어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요리가 나오기에 이렇게 유명해졌을까?

만한전석 요리가 환상적일 것 같지만 사실은 대부분 우리가 알고 있는 음식들이다.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의 만한전석에도 주로 제비집 수프, 샥스핀, 전복과 해삼 찜, 그리고 상하이 대갑 게와 버섯, 중국인이 좋아하는 보양식 자라탕 등이 올랐다. 개별적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중국 음식들이다.

만한전석이 유명한 이유는 진귀한 음식과 엄청난 가짓수 때문만은 아니다. 만한전석은 미각은 물론이고 시각과 촉각을 포함한 오감을 만족시켜야 하는 요리다. 정교하고(精), 화려하며(繁), 풍성하고(豊), 진귀한(珍) 것이 거의 예술에 가깝다. 어떤 요리는 너무나 아름답고 예쁘게 장식하고 조각해 놓아서 먹기가 아까울 정도다.



역사책에 명칭 기록 없어…현대에 재조명



중국 최고의 잔칫상으로 일컬어지는 만한전석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흔히 청나라 강희황제 때 시작됐다고 이야기하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청나라 때 만한전석이라는 이름의 궁정 잔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통 역사책인 정사(正史)에서 청나라 궁중의 잔치 이름으로 만한전석이라는 명칭이 쓰인 적은 한 번도 없다. 대신 개인들이 남긴 문집이나 기록에 궁정이 아닌 관청이나 민간에서 주최한 연회 중 만한석(滿漢席)이라는 이름의 잔칫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청나라 궁궐에서 만주족과 한족 관리가 모여 서로의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이야기는 허구였을까?

그렇지도 않다. 청나라 궁정에서는 잔치가 자주 열렸다. 공식 연회만 해도 황실의 사돈인 몽고 친족을 초대하는 잔치(蒙古親藩宴)를 비롯해, 문무대신의 새해 하례 잔치(廷臣宴), 황제 친족의 회갑잔치(萬壽宴), 청나라 때 단 네 차례 열렸던 노인잔치인 천수연(千수宴) 등이 있다. 당연히 만주 음식과 중원의 음식이 동시에 차려졌다. 연회의 성격과 종류에 따라 만주 음식은 모두 여섯 등급, 한족 음식은 다섯 등급으로 구분해 따로따로 준비를 했다. 이런 연회 때마다 만주족과 한족의 관리들이 모두 참석해 함께 음식을 먹었다. 그러니 명칭만 쓰지 않았을 뿐 모두 일종의 만한전석인 셈이다.

만한전석이 궁중잔치 이름으로 둔갑해 유명해진 것은 현대의 일이다. 1970년대 홍콩에서 당시 거금을 들여 만한전석에 등장했다는 108가지 요리를 모두 재현한 것이 TV로 중계되면서 만한(滿漢) 화합을 위한 최고의 중국요리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청나라의 이중성 엿보이는 자리

그런데, 만한전석이 진짜 만주족과 한족의 화합을 위해 마련된 잔치였을까? 만주족과 한족이 모두 모여 먹는 잔치는 그 기원을 흔히 청나라 강희제 때 시작된 노인잔치, 천수연에서 찾는다. 청나라 역사를 서술한 정사인 청사고(淸史稿)에는 이때 65세 이상의 만주족 문무대신 680명과 한족 관리 340명 등 약 1000명을 초대했다고 나온다. 이 잔치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한족과의 화합 시도가 아니라 만주족의 세력 과시였다고 할 수 있다. 건륭황제의 은덕으로 사해(四海)가 평온하고 천하가 부유해졌다며 만주족·한족 노인은 물론 조선과 베트남 등 주변국 노인들까지 모두 3000명을 초대했다. 우리 정조 실록에도 이때 청나라의 초대를 받아 축하 사절단을 보내면서, 사신들을 65세 이상 노인으로 구성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전성기 청나라에서 피지배 계층인 한족의 협조를 구한 것이 아니라 한족과 주변국에 청나라의 세력을 과시하는 잔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만한전석이 한족과 만주족의 화합과 화해를 위한 잔치였다고 알려졌을까? 이는 청나라 때의 피지배 계층인 지금의 중국, 즉 한족이 자신들의 도움 없이는 청나라가 존재할 수 없었다고 자기합리화를 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강할 때는 안하무인으로 스스로를 과시하고, 약할 때는 자기 합리화를 하는 중국의 이중성을 만한전석에서 엿볼 수 있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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