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열하일기로 배우는 나라사랑

압록강 건너 이국땅 이 갈대…아~ 본래 우리 땅 우리 갈대 아니었던가!

입력 2016. 03. 0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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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갈대를 보고 빼앗긴 영토를 회상하다


고조선·고구려·발해의 옛 영토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싶어

강 건너자마자 갈대 베어보며

“붓대 만들기에 적합한 것 같다”

 

 

 

현재 시판 중인 갈대로 만든 붓. 필자 제공

 

압록강 건너편의 갈대를 살피다



1780년 7월 25일, 연암 박지원이 도(道)에 관해 인상적인 강연을 하는 동안, 배는 어느새 갈대가 땅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빽빽이 자란 압록강 건너편 언덕에 닿았다. 하인들이 다투어 배에서 내려 갈대를 꺾어 그 위에 사절단 대표가 앉을 수 있도록 배에서 쓰던 돗자리를 걷어다 펼쳐 놓으려 한다. 그러나 갈대가 칼날 같고, 검고 질퍽한 진흙땅이라 여의치 않다.



더구나 배 다섯 척 중에서 사절단 대표와 연암을 태운 두 척은 도착했으나, 앞서 출발했던 세 척의 배가 문제였다. 사공들이 착오를 일으켜서 2㎞쯤 떨어진 강 한가운데의 섬에 말과 사람, 그리고 청나라에 보낼 토산물을 내리게 한 것이다. 대표는 그들이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갈대밭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후, 섬에 있던 가마꾼들이 도착하자 대표는 부대표와 서장관보다 먼저 가마를 타고 출발했다. 말을 탄 두 명의 군악병이 뿔 나발을 불며 길을 인도하고, 두 명의 보병은 갈대를 눕혀 대표가 탄 가마가 지나갈 수 있도록 했다.



연암은 대표의 가마를 뒤따랐는데, 그 바쁜 행차 중에도 남다른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열하일기’에 기록돼 있다.



“나는 말을 탄 채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갈대 하나를 베어보았다. 껍질은 단단하지만, 속살이 무르고 두터워서 화살을 만들 만큼 견고치 않으나, 붓대를 만들기에는 적합한 것 같았다. 이때 놀란 사슴 한 마리가 마치 보리밭 사이를 나는 새처럼 갈대를 넘어 빠르게 달아나니 모든 일행이 놀랐다.”


 

이집트인이 갈대로 만든 필기구와 케이스. 
 루브르 박물관 소장

 


갈대가 주는 메시지



갈대는 흔히 나약하고 변하기 쉬운 인간에 비유된다. 인간을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무기력하며, 유한한 ‘상한 갈대’로 비유한 성경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즉 인간은 갈대처럼 아주 미약한 존재이지만, 사고(思考)의 힘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파스칼의 명언도 실은 성서에서 비롯된 것이다.



갈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실생활에 유용하게 활용되어온 식물이기도 하다. 고대 이집트인은 갈대로 필기구는 물론 배도 제작했으며 로마인도 갈대로 펜을 만들었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B.C. 58∼B.C. 19)은 어릴 때 어머니가 만들어준 갈대 화살로 날아가는 파리를 쏘아서 모조리 적중시켰다고 한다. 또한, 우리 조상은 오래전부터 갈대로 만든 화살을 점치는 데 사용했다.



우리에게는 갈대와 관련된 흥미로운 역사적인 일화가 전해진다. 고구려 미천왕은 즉위하기 전에 큰아버지인 봉상왕의 살해 위협을 피해 압록강 변의 사수촌(思收村)에 숨어서 소금 장사로 생계를 연명했다고 한다. 봉상왕의 폭압 정치는 당시 국방부 장관 격인 창조리의 쿠데타로 마감되었는데,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창조리가 후산(侯山) 북쪽 사냥터에서 사람들에게 왕의 교체를 희망하는 자는 자기처럼 갈댓잎을 모자에 꽂으라고 하니 모두 따랐으므로, 봉상왕을 폐하고 미천왕을 옹립했다.”



미천왕은 31년 동안 재위하면서 고구려의 영토 확장에 큰 업적을 쌓았는데, 고조선 시대의 우리 땅에 중국이 설치한 행정구역을 공략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302년 현도군을 공격해서 8000명을 사로잡고, 311년에는 요동 서안평을 점령했다. 313년과 314년에는 각각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했다.



연암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곳이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 땅에 존재했다고 확신했던 인물이다. 그 때문에 그가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갈대를 베어 살펴봤던 사실을 ‘열하일기’에 기록한 것은 매우 의도적으로 보인다. 그는 독자들에게 압록강 서편은 물론 북쪽도 지배했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연행도.  숭실대학교 소장


구련성에서의 야영(野營)



사절단 대표 일행은 압록강과 4㎞ 거리에 있는 애자하(愛刺河)라는 강에 이른다. 현재는 구름이 많이 낀 강이라는 뜻을 가진 아이허(애河: 애하)로 불린다. 그곳에는 사절단 일행을 건너게 해줄 두 척의 중국 배가 정박했는데, 연암은 그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 놀잇배보다 크기는 작지만, 튼튼하고 치밀하게 제작됐다고 평가했다.



강을 건넌 일행은 8㎞쯤 떨어진 구련성(九連城)으로 향했다. 구련성이란 이름은 12세기에 금나라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서 아홉 개의 성을 쌓은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육로로 이동하는 조선과 명·청나라 사절들이 꼭 거쳐 가는 외교와 통상의 요지였다.



연암은 홀로 높은 언덕 위로 올라가 사방을 둘러본다. 그리고 산수가 맑고 벌판이 넓어 웅장한 고을이 들어설 만도 한데 우리나라와 중국이 내팽개쳐 둬서 황무지가 됐다고 탄식하며, 문득 옛일을 회고한다.



“어떤 사람은 고구려의 옛 도읍지인 국내성(國內城)이 바로 이곳이라고 말한다. 17세기 초 청나라가 요동 지역을 함락시킬 때 이곳 거주자의 일부는 명나라 장군에게 가고, 일부는 우리나라로 귀화했다. 명나라 멸망 후 장군에게 간 사람들은 모두 죽고, 우리나라로 귀화한 사람들은 청나라로 송환되었다. 이후 100년간 이곳은 높은 산과 맑은 물만 보이는 빈터가 되어버렸구나.”



이어서 연암은 사절단 일행이 이국에서의 첫 밤을 지새울 구련성의 야영지를 둘러보았다. 통역은 3∼5명씩 막사에 자리 잡고, 짐꾼·마부·하인은 5∼10명씩 시냇가에 나무를 얽어매어 숙소를 마련했다. 야영장은 밥 짓는 연기로 자욱하고, 사람 떠드는 소리와 말 우는 소리로 그럴듯한 마을의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뒤늦게 부대표와 서장관이 도착했을 때는 벌써 땅거미가 내려앉아 서른 군데에 횃불이 피워졌다. 주변의 아름드리나무들이 톱으로 베어지고 먼동이 틀 때까지 야영장은 장작불로 환하게 빛났다. 특히 연암에게 잊을 수 없었던 추억은 오늘날의 군 교도관에 해당하는 병사의 뿔 나발 소리에 맞춰 300여 명이 밤새도록 호랑이를 쫓기 위해서 고함을 지르는 ‘경호(警虎)’였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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