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열하일기로 배우는 나라사랑

지루한 국내일정은 과감하게 생략 생소한 열하체험은 상세하게 묘사

입력 2016. 02. 1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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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열하일기’ 들어가기


 압록강 건너는 장면부터 글 시작

8촌형 박명원이 조선사절단 정사

무더위와 싸우며 연경에 갔지만

건륭제 생일축하연 열하서 열려

천신만고 행군 끝에 연회 참석해

5개월의 일정 중 2개월만 기록

 

 




 

 



1780년 조선 사절단 구성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인 1780년 9월 11일(이하 모두 양력)을 계기로 조선에서는 일찌감치 중국에 파견할 축하사절단 구성에 착수했다. 같은 해 4월 24일 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사(正使: 대표) 박명원, 부사(副使: 부대표) 정원시, 서장관(書狀官: 총무) 한광근 등 3명의 공식 사절 명단이 기록돼 있다. 그러나 한광근은 갑작스러운 병 때문에 조정진으로 교체되었다.



조선에서 중국에 파견하는 공식 사절단은 일반적으로 30명이었는데, 공식 사절 3명과 이들을 수행하는 27명의 공식 수행원이 포함된다. 그러나 실제 사절단의 규모는 훨씬 컸다. ‘열하일기’에는 그 규모가 대략 300명이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보인다. 따라서 비공식 수행원이 270명이나 되는 것이다. 또한, 말도 250마리 정도가 동원됐다.



박명원(1725∼1790)은 영조와 정조에게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1780년은 물론, 1776년과 1784년에도 중국에 사절단 대표로 파견됐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는 영조가 가장 사랑했던 딸 화평옹주에게 장가들었는데, 10년 만에 부인이 사망해 홀아비가 됐다. 글솜씨가 뛰어났으며, 몸가짐이 바르고 검소했다고 한다.



박명원은 연암 박지원의 8촌 형이며, 나이도 12살이나 많았다. 특히 그는 연암을 각별히 아껴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는데, 1780년 중국에 데려간 것도 그중 하나다.



3명의 공식 사절 집안의 자제들은 소위 ‘자제 군관’이란 이름으로 사절단에 포함됐는데, 이는 선진문물을 견학시키기 위해서였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자신의 처지를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사신을 따라 중국에 들어가는 자는 호칭을 하나씩 얻는다. 통역은 ‘종사’, 군인은 ‘비장’, 나처럼 한가롭게 유람하는 자제 군관은 ‘반당’(伴當)이라고 한다. 그런데 반당은 ‘밴댕이’라는 물고기와 우리말로 소리가 같아서 놀림거리가 됐다.”



비록 연암은 이렇게 조롱받는 비공식수행원이었지만, 박명원의 친척이기 때문에 사절단 내에서 무시당하지 않았고, 중국인과 교류하는 데도 사절단 대표의 친척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의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문장력은 더없이 좋은 무기였다.



정원시(1735∼1782)는 이조참의 벼슬을 거쳐 대사성 직위에 있을 때 사절단 부대표의 역할을 맡게 됐다. 귀국 후 그는 호조 참판, 함경도 관찰사,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조정진(1732∼1792)은 청나라에 다녀온 후 정조에게 보고 들은 사실을 보고했으며, 대사간·이조참판·대사헌 등을 두루 거치고, 형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했다.



27명의 공식 수행원은 3명의 수석통역관을 비롯하여 각종 공물과 물자를 수집·운송·관리하는 24명의 압물관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주로 통역과 번역을 담당하는 사역원 소속이었으며 군인·의사·화가 등도 포함됐다. 그리고 270명의 비공식수행원은 연암처럼 자제 군관도 있었지만, 마부·하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중국 방문 일정

1780년 6월 27일 정조 임금은 중국으로 떠나는 박명원·정원시·조정진 등 3명의 공식 사절을 접견하고, 임무를 잘 처리하도록 당부했다. 이어 중국으로 출발한 300명의 사절단은 한 달 후인 7월 25일 압록강을 건너고, 8월 30일에는 청나라 수도 연경(베이징)에 도착했다. 장마철에 폭우와 무더위와 싸워야만 했던 힘든 여행이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건륭제는 만리장성 밖 북쪽의 열하에 있는 여름 별궁인 ‘피서산장’에 머물고 있었다. 그 때문에 조선 사절단은 연경에서 중국 신하들과 함께 황제 생일을 축하하는 의식을 치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9월 2일 밤 갑자기 열하에서 거행되는 생일축하 행사에 참여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았다.



9월 3일 오전, 공식 사절 3명, 통역관 3명, 장교 4명을 포함해서 총 74명만 열하로 출발하고, 나머지는 연경에 남았다. 말은 55마리가 동원됐다. 연암은 이전에 조선 사절이 가보지 못했던 열하를 방문하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기에 누구보다도 신이 났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는 길은 험준한 산길인 데다가 거리가 230km나 됐다.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밤낮없이 행군한 끝에 사절단은 9월 7일 열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식 사절 3명은 9월 8일 피서 산장으로 찾아가서 황제의 특별배려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고, 9월 9일에는 건륭제를 만났다. 9월 10일에는 건륭제가 초청하는 연회에 참석하고 연극을 구경했다. 그리고 9월 11일에는 생일축하 행사에 참여했다. 사절단이 열하를 떠나 다시 연경으로 출발한 것은 9월 13일이었다.



6일 동안 공식 사절이 분주한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연암도 그들 못지않게 보람 있는 시간을 보냈다. 바로 열하를 구경하고, 중국 지성인들과 글로 폭넓은 대화를 나눔으로써 많은 정보를 수집한 것이다.


다른 연행록과 차별화



사절단은 9월 18일 연경으로 돌아와 약 한 달간 그곳에 머물다가 10월 14일 조선으로 향했다. 그리고 11월 23일 한양에 도착해서 박명원과 정원시가 정조에게 귀국보고를 함으로써 5개월간의 임무가 마무리됐다.



5개월의 여행이었지만, ‘열하일기’에는 1780년 7월 25일부터 열하에서 연경으로 돌아온 9월 18일까지 2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의 일정만 기록돼 있다.



이는 연암의 기발한 착상이었다. 그간 많은 연행록의 지루한 국내 일정을 모두 생략해버린 것이다. 그 대신 ‘열하일기’의 첫머리를 우리 겨레의 영광과 치욕스러운 역사가 흐르는 압록강을 건너는 장면으로 시작했으며, 나아가 조선 사절단 최초의 열하 여행이라는 특이한 체험을 매우 자세하게 다뤘다.



교육부 산하 학술연구기관인 한국고전번역원이 제공하는 ‘한국 고전 종합 DB’의 ‘열하일기’ 한글 번역본은 향후 본 연재물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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