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국경 초월한 우정의 교과서
나이는 여섯 살이나 많았지만
막역한 사이였던 홍대용이
청나라 지성인들과
우정 나누는 모습 보며
벗과 사귀는 방법 깨달아
자신도 청나라 사람들과
국경 초월한 우정 쌓고
이를 ‘열하일기’에 담아내
18세기의 청나라는
하버드 대학교 마크 엘리엇 교수는 ‘건륭제’(2009년)라는 저서에서 18세기에 중국이 발전했던 두 가지 요인을 지적했다. 첫째는 1700년에 인구가 1억5000만 명이던 것이 1800년에는 3억 명을 넘어섰다는 사실, 둘째는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가졌었다는 사실이다. 건륭제 때 청나라의 영토는 1150만㎢로 현재 미국의 영토인 900만㎢보다 컸다.
엘리엇 교수는 조선을 비롯해 조공(朝貢)을 바치던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국가들까지 포함하면, 청나라의 영향력이 미쳤던 지역은 훨씬 광대했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건륭제의 입을 빌려 ‘조선은 조공국 중에서 그 비중이 미미했다’고도 주장한다. 그는 청나라가 18세기 후반에 급격히 쇠락했지만, 중반까지는 국제 정치·경제의 중심지였다고 말한다.
조선의 식자층에서 오랑캐라고 얕보던 종족이 중국의 본토를 차지하고 성공적으로 통치하는 기반을 만든 인물은 건륭제의 할아버지인 강희제다. 1661년 여덟 살에 황제로 즉위해 1722년까지 61년간 재위한 그는 중국 역사상 최장수 황제이자, 최고의 제왕으로 평가받는다. 오죽하면 건륭제가 할아버지보다 더 오래 황위에 있을 수 없다며 60년만 채우고 제왕의 자리에서 물러났을까?
강희제는 내부적으로는 반란을 평정했으며, 외부적으로는 대만을 복속시키고, 러시아와의 전쟁에 승리해 국경을 유리하게 확정했다. 황하와 양쯔 강의 치수를 통해 농업을 진흥시키고, 세제를 개혁해 국민의 부담을 덜어준 것도 그였다. 나아가 지배층인 만주족과 피지배층인 한족을 고루 등용하고, 문화발전에도 기여했다.
흥미롭게도 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피아노를 직접 배우고 연주했으며, 서양음악과 서양회화도 감상했다고 한다. 또한, 선교사들에게 천문대의 일을 맡기고, 서양의 지리학과 천문학을 중국에 전파했으며, 기하학에 관심을 갖고 유클리드 기하학을 만주어로 번역하도록 했다.
특기할 만한 일의 하나는 강희제가 광둥을 비롯한 4개의 항구를 외국에 개방한 일이다. 이로써 차·도자기·비단 같은 중국 제품이 서양으로 수출됐고, 그 대가로 중국은 막대한 양의 은을 확보했다. 무역흑자로 중국의 강남지역은 산업이 크게 성장했으며, 황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김창업의 ‘연행일기’
조선은 1637년 청나라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한 이후, 1644년부터 매년 네 차례씩 정기적으로 사절단을 청나라에 보냈으며, 특별한 계기에 별도의 사신도 보냈다. 이들은 귀국 후에 연행록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보고서를 남겼는데, 과연 변모하는 청나라의 모습이 제대로 담겼을까?
연행록 중에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비상한 관찰력과 천재적인 문장력으로 청나라 현실을 가감 없이 소개했다는 점에서 가장 뛰어난 연행록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연암이 이렇게 뛰어난 연행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선배들이 남긴 연행록을 참조했기에 가능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두 가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1712∼1713년 조선사절단의 중국 방문은 매우 특별하다. 그간 매년 네 차례나 보내던 정례 사절단을 동짓달에 한 번만 보내는 데 대해 청나라 조정과 합의를 이뤘기 때문이다. 또한, 사절단의 일행이 무려 537명, 말이 435마리나 동원되는 등 사상 최대 규모로 꾸려졌기 때문이다.
이때 사절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따라갔던 54세의 김창업은 귀국 후에 ‘연행일기’를 집필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친에 극렬하게 반대했던 김상헌의 손자인 그는 명문가의 후손이지만, 본인은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던 인물이다.
척화파의 후손에 의해 집필된 연행록이지만, 청나라의 모습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상세히 기록되었기 때문에 ‘연행일기’는 ‘열하일기’를 비롯한 이후의 연행록에 자주 언급된다.
홍대용과 연암 우정의 기록
연암이 ‘열하일기’를 집필하는 데 결정적으로 자극을 받은 것은 홍대용의 ‘연기(燕記)’다. 홍대용은 연암보다 나이가 여섯 살이나 위였지만, 서로 공경하는 말투와 호칭을 사용하면서 돈독한 우정을 나눴던 인물이다. 그리고 비록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지만, 조선의 개혁을 누구보다 염원했던 둘도 없는 동지였다.
1765년 중국을 방문한 홍대용은 한문 연행록 ‘연기’에서 청나라의 눈부신 발전상을 소개했으며, 국문으로 ‘을병연행록’도 집필했다. 무엇보다도 홍대용은 중국의 저명한 지성인들과 글로 소통하고 귀국 후에는 서신으로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나눴으며, 이를 ‘회우록’으로 엮었다. 그 서문은 연암이 썼는데 일부를 의역해 소개한다.
“제 나라에서는 한마을에서도 서로 알고 지내지 않던 사람이 청나라에 가서는 마음을 허락한 이유를 물었더니, 홍대용이 말했다. ‘이곳에서는 인습에 얽매여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답답했소. 청나라가 옛날 중국이 아닌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으나, 제도는 바뀌었어도 도의는 달라지지 않았소. 우리는 서로가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번거롭고 까다로운 예절 따위는 버리고 사귀었소.’
나는 ‘회우록’을 다 읽고 탄복했다. ‘홍대용은 벌써 벗을 사귀는 방법에 통달했구나! 나도 이제야 벗을 사귀는 법을 알았노라! 벗을 사귈 때 그가 누구를 벗으로 삼는지를 보고, 누가 그를 벗으로 삼는지를 살펴보며, 또한 그가 누구를 벗하지 않는지를 헤아리는 것이 방법이로구나.’”
청나라 지성인들과 우정의 만남, 그것은 연암에게 큰 충격이었다. 충격은 언젠가 자기도 청나라를 방문하면, 진솔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배울 것은 배우고, 알릴 것은 알려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홍대용보다 15년 후인 1780년 청나라를 방문한 연암도 열심히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쌓았고 이를 ‘열하일기’에 담았다. 이런 의미에서 ‘회우록’과 ‘열하일기’는 한국과 중국 간 아름다운 우정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