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셰익스피어와 연암 박지원
인도와도 바꿀 수 없는 존재 셰익스피어와 달리
연암 박지원, 국내외에서 제대로 평가 못 받아
책속 곳곳 옛 우리 영토 고증 '나라사랑' 일깨워
서양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동양에는 연암 박지원이 있다. 연암의 '열하일기'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기행문학이요, 강병부국(强兵富國)을 위한 의식개혁 교재라고 할 수 있다. 올해 셰익스피어 사망 400주기를 맞아 국내외에서 많은 기념사업이 거행될 예정이다. 이를 계기로 국방일보는 '열하일기'를 오늘의 시각에서 새롭게 재조명해보는 기획특집을 마련했다.
갓난아이 첫울음, 셰익스피어 해석
태아는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 엄마 배 속에서 호흡운동과 다리운동을 하며 사전준비를 한다. 또한 출산이 가까워지면 캄캄한 태내에서 빠져나갈 통로를 알고 그 방향으로 머리를 돌린다. 더구나 출산 일시를 아는 사람은 산모도 산부인과 의사도 아닌 바로 태아뿐이다.
인공분만을 제외하고는! 여기까지는 의학적으로 의견이 거의 일치하는 듯하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나며 처음 우는 소리, 즉 고고지성(呱呱之聲)의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공인된 학설이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이에 관한 학계의 지루한 다툼을 소개하는 것보다는 동서양 대표적 문장가의 흥미로운 견해에 한 번쯤 귀를 기울여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 세 딸 가운데 두 딸에게만 왕권과 국토를 나눠준 늙은 국왕이 이들에게 배신당한 후, 유산을 주지 않은 셋째 딸에게 의지하다가 함께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다는 얘기다. 이 작품의 4막 6장에서 폭풍우 속에 광야로 쫓겨난 리어왕은 아부와 거짓이 판치는 인간 세계의 부조리를 폭로하는데, 그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우리가 태어날 때 공기를 마시고, 응애하고 첫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위선적이고 어리석은 자들만 사는 거대한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라네."
사악하고 어리석은 무리만 득실거리는 불합리한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갓난애가 첫울음을 터뜨린다? 세계적 문호다운 발상이다. 특히 세상과 인간의 삶은 가치가 없는 것이며 개선할 수 없다는 염세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솔깃한 해석이다.
연암 박지원의 풀이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연암 박지원이 있다.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에는 요동벌판에 우뚝 선 연암이 고고지성에 관해서 일장 연설하는 대목이 보인다.
"갓난애는 태어날 때 해와 달과 부모를 처음으로 보며,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친척들도 보게 되지요. 이런 기쁨과 즐거움을 늙을 때까지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니 마땅히 즐거워하고 웃어야 할 거요.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분노와 설움이 가득 찬 표정으로 한없이 울부짖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갓난애가 태어난 것을 후회하고 스스로 통곡하며 애통해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잘났거나 어리석거나 인간은 죽기 마련이며, 사는 동안 실수하고 죄를 짓고, 근심과 걱정이 끊이지 않을 것을 예감해서 첫울음을 터뜨린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는 갓난애의 본심과는 크게 어긋나는 말이오. 태아는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는 캄캄하게 막혀서 갑갑하게 지냅니다. 그러다 넓고 환한 곳으로 빠져나와서 손발을 펴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가슴이 탁 트이니 저도 몰래 참된 소리를 내어 감정을 남김없이 쏟아내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갓난애의 거짓과 꾸밈이 없는 울음을 본받아 요동벌판에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잖소?"
고고지성에 관해서 연암은 셰익스피어와 같은 염세적인 해석도 소개하면서, 그만의 독특하고 낙관적인 풀이를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연암의 낙관적인 해석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요동을 비롯한 빼앗긴 겨레의 땅과 실추된 국가 위신을 되찾아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이다.
연암은 자신의 숨겨진 의도를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열하일기'의 행간을 읽음으로써 그의 염원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옛 우리 영토를 고증하고, 치욕스러운 역사를 상기시킴으로써 겨레와 나라사랑의 소중함을 은연중에 일깨워주고 있다.
열하일기로 배우는 나라사랑
올해는 셰익스피어 사망 400주기다. 이를 계기로 영국을 비롯한 각국에서 연극·공연 등 다양한 기념행사가 예정돼 있다. 연암 타계 200주년이던 2005년에 우리가 그를 초라하게 기렸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영국인에게 인도와도 바꿀 수 없는 존재로 각인된 셰익스피어와 비교할 때, 연암 박지원은 국내외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국수주의적이고 단편적인 비교일지 몰라도, 고고지성에 관한 해석에서 보았듯이 연암은 문장가로서의 역량에서 결코 셰익스피어에게 뒤지지 않는다.
또한 연암의 삶과 작품은 그의 아들과 주변 인물들에 의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나, 셰익스피어의 그것은 아직 명쾌하게 풀리지 않은 채 베일에 싸여 있다.
그간 연암에 관한 학술적인 연구가 상당히 집적됐다고 한다. 그러나 자기절제를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던 연암의 남다른 삶, 그리고 대문호로 평가받아 마땅한 작품들에 관한 연구성과를 학계에서만 제한적으로 이용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연암은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을 구경하고 무엇 무엇이 대단한 볼거리인 양 떠들어대곤 한다. 그러나 나는 똥거름 무더기가 볼거리요, 깨진 기왓장과 버려진 조약돌을 이용하는 방법이 구경거리더라."이 말은 오늘부터 연재하는 기획특집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본 연재물은 '열하일기'에 나타난 연암의 이렇게 티 없이 맑고 순수한 겨레 사랑, 나라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21세기의 관점에서 새롭게 들여다볼 것이다.
이를 위해서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모든 연월일을 과감하게 음력이 아닌 양력으로 대체할 것이다. 또한, 흔히 우리가 듣는 실학·북학·노론·소론 등과 같은 학술용어의 사용을 자제하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글세대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자로 표기된 용어들을 최대한 풀어서 쓸 것이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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