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끝> 연재를 마치며?
전장의 지휘관과 화가의 닮은 점
죽음도 두려워 않는 정신
예측 불가의 창조적 전략
기필코 이기겠다는 열정
■ 전쟁을 빼놓고 인류역사를 말할 수 없다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 단정할 수 없을지 몰라도 전쟁이 '결정적인' 사건임에는 분명하다.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Herodotos·BC 484∼425) 가 '역사'(BC 440)를 저술한 이유도 헬라스인과 비헬라스인들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 데 있었다.
전쟁이 역사 변화의 결정적 요인이라는 것은 정치공동체 간의 갈등과 대립을 해결할 궁극적 방법으로 전쟁 이외의 것을 아직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로운 해결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집단 간의 대립을 해결할 궁극적 수단으로서 전쟁의 중요성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정치공동체로서 국가가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이유도 외부로부터 오는 위협을 막기 위한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안보위협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국가로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국가와 전쟁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독일 법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1888∼1985)가 정치를 '적과 동지의 구분'으로 정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의 목표가 국가 운영에 있다면 국가의 궁극적인 존재 방식은 적과 동지 간의 전쟁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인류역사에서 전쟁만큼 극적인 것은 없다. 그 어떤 인간의 행위도 전쟁만큼 극단적인 합리성과 극단적인 열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의 목숨만 걸린 게 아니라 정치공동체의 운명 또한 전쟁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뛰어난 통치자의 등장은 국력의 성장을 이끌었고 이는 곧 전쟁을 의미한다. 많은 통치자는 전쟁을 통해 자신의 권력과 의지를 과시했다. 전쟁의 승리는 통치자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해당 집단의 자부심의 근원이 됐다. 아테네 시민들은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음 자신들의 위대함을 드러낼 파르테논 신전을 축성했다. 로마의 황제들은 개선문을 세워 자신들의 승리를 기념했다.
■ 전쟁과 미술의 정치적 만남
절대왕정이 유럽 국가를 지배하게 되면서 전쟁은 통치자의 전유물이 됐다. 유럽의 왕실들은 자신들의 권능과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조상의 승리를 기념하는 그림을 화려한 바로크 궁전에 전시하기 시작했다. 궁전이 높고 큰 만큼 승리의 영광을 기억하기 위한 그림 또한 거대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 민족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심화됐다. 왕실의 영광은 민족국가의 자부심으로 옮겨왔다. 많은 지방권역으로 나누어졌던 유럽의 국가들은 민족국가로 발전하면서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역사를 갖게 되었고 민족적 자부심을 고양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됐다. 민족적 기원을 갖는 일들이 역사로부터 소환돼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고, 민족적 자부심의 기원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유독 19세기에 전쟁그림이 많이 제작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전쟁과 미술의 만남은 대단히 정치적이다. 단순히 전쟁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목적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는 이들이 갖게 될 정치적 의미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광대한 공간에서 길게는 수일간 계속되는 전투를 하나의 화면에 담는 것 자체가 선택을 요구한다. 화가들은 화면의 제한 속에서 무엇을 그릴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며, 그들의 선택은 결국 그림을 의뢰한 왕실이나 국가의 요구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의 압축이나 왜곡이 불가피하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쟁그림을 승리의 영광을 재현하고 기록하는 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전쟁은 사실의 기록이라는 이성적 작업을 초월하는 인간의 투혼과 열정, 그리고 우연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절대열세의 전력으로도 거대한 적을 무찌른 전투 사례가 너무 많다. 페르시아 대군을 격퇴한 마라톤 전투에서부터 12 대 133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량해전에 이르기까지 객관적 전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적을 상대로 승리를 이끈 전쟁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전쟁 혹은 전투는 예술적 열정과 직관,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요소가 작용하는 종합 예술(art) 같은 것이다. 뛰어난 지휘관이야말로 명작을 그려내는 화가처럼 상대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절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과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 적의 약점을 꿰뚫고 자신의 강점을 최대화하는 능력, 병사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열정, 그리고 패배와 죽음의 운명마저 피하지 않는 정신력이 있을 때 기적 같은 승리를 일굴 수 있는 것이다. 전략전술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예술'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 전쟁그림에 내포된 두 개의 시대와 세 개의 시선
지난 1년 반 동안 66개의 전쟁그림을 다루면서 필자가 줄기차게 추구했던 것도 이런 것이다. 화가는 전장에 나선 지휘관도 병사도 아니지만 예술가의 관점에서 해당 전쟁 혹은 전투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게재했던 '벙커힐 전투'(1776) 그림에서 화가 트럼블(J. Trumble)이 영국군을 상대하는 미국 민병대의 두려움과 투혼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지난주 다뤘던 피카소(P. Picasso)의 '게르니카'(1932)에서는 인간 신체의 해체를 통해 인류문명의 파괴를 다뤘다고 보았다.
물론 화가들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 역시 시대적 제약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상황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의 그림은 적어도 두 개의 시대와 세 개의 시선이 만나고 있다. 시대적으로는 전쟁의 시대와 제작의 시대가 만나고 있고, 시선의 차원에서는 전쟁 당시의 시선과 현재 의뢰자의 시선, 그리고 화가의 시선이 추가된다. 역사의 진실과 권력의지, 그리고 화가의 예술가적 영감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전쟁그림인 것이다. 전쟁그림을 보는 것은 두 개의 시대와 세 개의 시선을 함께 읽는 일이다.
작품 선정에서 시대와 지역, 국가를 고루 포함시키려 노력했다. 서양의 경우 대체로 고루 선정했다고 자부한다. 그림양식상으로도 고대 벽화 양식에서부터 르네상스, 그리고 현대의 인상주의와 입체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회화 양식을 다뤘기 때문에 전쟁그림을 통한 미술의 이해라는 기본적인 목표는 달성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나라와 동양그림이 적다는 것이었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전쟁 자체를 무인의 일로 폄하했기 때문에 단순한 기록화 이상의 작품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임진왜란에서 거둔 이순신 제독의 위대한 승리를 다루고 싶었지만 작품성 있는 그림을 찾지 못했다.
그림에 관련된 전투자료는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신뢰성 있는 문헌과 웹사이트를 이용했다. 그러나 많은 전쟁사학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일이지만, 오래된 전쟁일수록 객관적인 자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일자나 병력수, 작전 등에 있어 불일치하는 내용이 많아 혼란스러운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럴 경우 합의된 사실 중심으로 기술하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약해서 기술하는 과정에서 필자의 자의적 판단이 들어간 부분 또한 적지 않았으리라. 끝으로 필자에게 이런 기회를 준 국방일보 정남철 팀장과 늦은 원고마감에 고생 많았을 이영선 기자, 그리고 지면제작을 맡아준 편집기자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무엇보다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린다. 독자 없는 글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쉽지 않은 글에도 성의껏 읽어준 독자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연재였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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