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전쟁과미술

폴란드, 민족독립 향한 전사의 투혼 보이는 듯…

입력 2015. 11. 24   18:33
0 댓글

(63)보치에흐 코작의 '오르신카 그로호프스카 전투' (1886)


 ‘11월 봉기’ 성공…급진세력 등장 러시아와 전쟁 불가피

  산림·타원형 방어진 현실적 묘사… 인상주의 기풍 표현 

 

 

 

 

 유럽에서 우리나라와 가장 유사한 환경에 있는 나라가 폴란드다.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인 형국이 비슷했다. 러시아·프러시아(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동서남으로 에워싸고 있었고 북쪽은 북해로 열려 있지만 스웨덴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30년 종교전쟁을 끝내면서 유럽 열강들은 안정을 되찾았고 강력한 절대주의국가로 발전해갔다. 이 시기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고, 러시아 표트르 대제는 새로운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다. 그러나 잡다한 정치세력의 연합체였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귀족들 간의 불화와 갈등, 그리고 왕실에 대한 견제는 중앙집권화된 국가 건설의 길을 차단했다. 결국 폴란드는 동유럽의 세력균형을 추구하던 러시아와 프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의해 3차례 영토분할(1772, 1793, 1795년)된 끝에 주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나폴레옹 전쟁(1805~1815) 동안 잠시 나라를 되찾았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함으로써 물거품이 되고 만다. 1815년 빈 회의는 모든 것을 나폴레옹 전쟁 이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나폴레옹 군대를 격퇴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자신의 동생 콘스탄틴 파블로비치를 총독으로 세우고 사실상 식민통치를 실시했다.

 러시아 지배에 대항해 폭력적 봉기가 일어난 것은 1830년 11월 29일이다. 일단의 사관생도가 무기를 탈취하고 총독관저를 공격했다. 총독을 사로잡지 못했지만 시내 무기고를 장악함으로써 시민들이 무장할 수 있게 됐다. 다음날 시민군이 러시아군을 바르샤바에서 몰아내면서 ‘11월 봉기’가 막을 열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신망 높은 유제프 흐워피스키(1771~1854) 장군이 총통으로 임명됐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 그는 군대를 동원하기보다 러시아와의 평화적 협상을 추진했다. 그러나 급진세력은 폴란드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고 폴란드 의회도 러시아에 대한 ‘거국적 봉기’를 선언했다. 러시아의 대응 또한 강경했다. 니콜라이 1세는 폴란드의 ‘완전하고도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다.

 남은 대안은 러시아와의 전쟁이었다. 다음해 1월 폴란드 의회는 니콜라이 1세의 폐위를 선포하고 사실상 독립을 선언했다. 2월 4일 러시아의 11만5000명의 대군은 이미 폴란드 국경을 넘어오고 있었다. 폴란드군은 7만 수준으로 수적으로 밀렸다. 무기나 보급 또한 변변치 않았다.

 첫 번째 전투는 바르샤바에서 동쪽으로 100㎞쯤 떨어진 스토체크(Stoczek)에서 일어났다. 2월 14일 본진과 분리돼 진격하던 러시아군을 폴란드군이 매복 공격했다. 3000명 대 1000명의 절대 열세였지만 폴란드의 승리였다. 폴란드군은 러시아군이 전열을 구축하기 전에 대포 공격으로 전열을 와해시켰다. 그리고 기병공격을 감행해 적을 패퇴시켰다. 러시아군 주력은 95㎞ 남쪽 루불린(Łukow)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서로간에 교신이 이뤄지지 않아 도와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더 본격적인 전투는 2월 25일 바르샤바 외곽 오르신카 그로호프스카(Olszynka Grochowska)에서 벌어졌다. 폴란드군은 바르샤바 외곽 산림지대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러시아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폴란드군 병력은 3만6000명으로 러시아의 6만 대군에 절반 약간 웃도는 수준이었다. 일부 병력의 경우 나폴레옹 전쟁을 경험한 예비역이었지만 대부분은 11월 봉기 이후 들어온 자원병이라 훈련이나 무장에서 러시아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대포 전력에서도 115대178로 열세였다. 폴란드군이 산림지대에 방어선을 구축한 것도 전력상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전술적 선택이었다.

24일 바르샤바 북부와 동부 외곽에 도착한 러시아 사령관 디비치(Hans Karl von Diebitsch)는 26일 전면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24일 북쪽에서 시작된 전투는 러시아군 일부가 퇴각하자 계획을 바꿔 25일 그로호프스카 지역을 중심으로 전면공격을 단행하게 된다. 낮 12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하루 꼬박 전개됐지만 러시아군은 폴란드의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결국 퇴각하게 된다.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9500여 명. 폴란드군의 피해 역시 6500여 명으로 적지 않았다.

 폴란드 화가 보치에흐 코작(Wojciech Kossak·1856~1942)의 그림 ‘오르신카 그로호프스카 전투’(1886)는 이날 전투를 폴란드군 중심으로 묘사하고 있다. 폴란드군은 숲의 고랑과 나무를 이용해 반원형의 방어진을 구축하고 러시아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다. 가운데 힘차게 솟아 있는 자작나무가 견고한 엄폐물이 돼준다면 그 앞에 쓰러져 있는 굵은 자작나무 역시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전투의 주인공은 전열의 병사들이다. 옆에서 다른 병사가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상황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총알을 장전하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에서 전사의 결연함을 느낄 수 있다. 부릅뜬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는 그들의 표정에는 민족 독립을 향한 투혼이 서려 있다.

 최전선의 병사들 뒤로 말을 탄 지휘관들도 분주한 모습이다. 그 가운데 프록코트와 실크모자를 쓴 이가 폴란드군 총사령관 흐워피스키 장군일 것이다. 그는 총통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총사령관으로 폴란드군을 지휘했다. 그 뒤로는 망원경으로 전방을 살펴보는 관측장교와 포병들의 사격 장면이 그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가운데 지휘부를 타원형의 방어진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로 둘러싸고 있어 안정감을 부여해 준다. 병사들의 얼굴에서는 전투 그림에서 흔히 발견되는 낭만주의적 감정 표현이 두드러지지만 그림 오른쪽 대열의 병사들은 거친 붓질로 실루엣만 드러내는 화법을 사용함으로써 메케한 화약 연기에 시야가 가리는 전장의 모습을 보다 현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푸른색 바탕에 위로는 하늘로 솟은 잎갈나무의 황금빛 단풍이 조화를 이루고 아래로는 하얀 눈과 갈색 톤이 대비를 이루며 수준 높은 색채감을 보여준다. 사물의 움직임과 색채를 중시했던 1880년대 인상주의 경향을 작가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폴란드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결정적으로 러시아군을 패퇴시키지는 못했다. 폴란드군 역시 너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후퇴하는 러시아군을 추격할 수 없었다. 결국 5월 2일 오스트로렌카 전투에 패배함으로써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만다. 폴란드는 다시 식민지로 전락했고 1918년이 되어서야 겨우 폴란드란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폴란드가 패배한 것은 객관적 전력의 문제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돼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지휘관은 그들이 러시아와 싸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전쟁을 준비하기보다 평화협정에 매달렸다. 싸우면서도 방어적 자세로 일관했다. 유럽 열강의 도움을 기대했으나 누구도 오지 않았다. 폴란드는 국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 결과 폴란드는 130년간의 식민통치를 감내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