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가스의 무서움과 병사들의 고통 그려
너부러져 있는 부상병과 대조 … 구원·갱생의 가능성 전해
제1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기념비적 작품
전쟁에 이기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1781~1831)가 정의했던 전쟁이 “나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 행위”라고 한다면 무제한적인 폭력 사용과 극단적인 상호 작용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쟁의 야만적 요소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전쟁의 본질을 무시하려 한다면 이는 무익하고 그릇된 노력이 될 것”이라는 그의 경고는 20세기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예언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을 때 유럽의 군대는 이미 기관총과 작렬탄 대포라고 하는 가공할 살상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기들의 파괴력은 전쟁 양상을 바꿔버릴 정도로 대단한 수준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중세 이후 진행된 화승총과 화약의 발전과정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더욱 정교해지고 살상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을 뿐이다.
가장 새롭고도 놀라운 신무기는 독가스라는 화학무기였다. 역사적으로 매캐한 연기를 이용했다거나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전술적 무기로 채택해 전장에서 직접 사용한 것은 1차 대전이 처음이었다. 19세기 산업혁명으로 독성물질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서구의 국가들은 이를 전술무기로 활용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졌던 것이다.
1854년 크림전쟁이 한창이던 때 영국과 프랑스연합군에서는 러시아군의 세바스토폴 요새를 함락하기 위해 카코딜청산염을 주원료로 하는 화학탄을 사용하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지휘부는 “적의 우물에 독을 푸는 것과 같은 나쁜 전쟁 방식”이라고 지적하면서 거부했다. 미국 남북전쟁 와중에 염소가스탄의 사용이 건의됐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
사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화학무기에 대한 우려는 널리 퍼져 있었다. 각국은 1899년 헤이그회의에서 질식가스 사용을 금하는 조약을 맺었고, 1907년에는 화학무기의 범위를 확대해 독성물질 사용을 금지하는 헤이그협약(Hague Convention)에 서명했다. 그러나 승리가 유일한 가치인 전쟁에서 국제법의 규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1914년 7월 전쟁이 발발하자 화학무기는 곧 사용됐다. 독일군에게 밀리며 근근이 마르강 방어선을 지키던 프랑스군이 최루가스가 담긴 수류탄을 사용한 것이 8월이었다. 10월에는 독일군이 자극물질을 채운 산포탄을 영국군 진지에 발사했지만 이들 모두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효과는 미미했다.
1915년에 들어서면서 화학무기가 본격적으로 운용되기 시작했다. 더 고통스러운 염소가스가 사용됐다. 1월 2일 독일군에 의해 살포된 염소가스는 순식간에 영국군 140명을 죽게 만들었다. 독가스의 가공할 살상력을 확인한 독일군은 4월 22일 이프르(Ypres) 전투가 시작되기 전 168톤의 염소가스를 전장 전역에 살포했다. 가벼운 동풍을 타고 독가스가 살포되자 순식간에 프랑스군 전선이 허물어졌다. 제대로 방독 장비를 갖추지 못한 연합군에게 황록색의 독가스는 공포 그 자체였다. 특히 참호 아래 누워 있는 부상병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독가스는 공기보다 무겁기 때문에 참호 아래로 가라앉았고, 참호에 웅크리고 있던 병사들은 고통 속에 죽어가야 했다.
방독 장비가 개선되면서 독일군과 연합군은 더 치명적인 독가스 개발 경쟁에 들어갔다. 독일군에 대응하기 위해 연합군은 1915년 포스겐(phosgene) 가스를 개발했고 이 화학무기는 많은 생명을 빼앗아갔다. 화학무기로 죽은 10만 명 중 약 85%가 포스겐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보다 더 무서운 화학무기는 겨자가스(mustard gas)였다. 1917년 독일군에 의해 도입된 이 독가스는 피부에 닿기만 해도 미란성 수포가 발생하면서 병사들에게 무시무시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실린더나 대포, 혹은 전용 박격포에 의해 살포되는데 일단 겨자가스에 노출되면 해당 부위에 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황록색 물집이 생기고 눈은 뜨지 못할 정도로 심한 따가움을 느낀다. 게다가 내장까지 튀어나올 것 같은 구토에 시달린다. 특히 기관지가 찢어질 듯한 아픔과 함께 목이 부어올라 곧 질식해 죽을 거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노출이 심한 환자의 경우 수주간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다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미국 화가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1856~1925)의 작품 ‘개스드(Gassed)’는 겨자가스 공격에 부상당한 영국군이 응급치료소로 이동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영국 정부로부터 미군과 협력하는 모습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고 서부전선을 시찰하던 사전트는 가스 공격에 부상당한 병사들이 줄지어 가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옅은 석양빛을 배경으로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걸어가는 일단의 병사들이다. 겨자가스에 노출된 이들은 모두 눈을 흰 붕대로 감싸고 있지만 위생병의 도움을 받으며 질서정연하게 응급치료소로 향하고 있다. 오른쪽 가장자리에 사선으로 이어진 로프는 그림 오른쪽 밖에 치료소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림 오른쪽에는 또 한 무리의 부상병들이 대각선으로 걸어오면서 공간적 깊이를 강조하고 있다. 실물 크기의 병사들이 보여주는 걸음거리와 손발의 현실감 넘치는 움직임은 사실성을 더해 준다.
독특한 것은 이들 눈먼 자들의 행군은 길 밖에 너부러져 있는 또 다른 부상병 무리와 대조를 이루며 구원과 갱생의 가능성을 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상실과 고통이 대지를 지배하고 있는 잔혹한 현실에서도 한 손에 엔필드 소총을 쥐고 묵묵히 걸어가는 이들의 행군에는 포기할 수 없는 생명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고통스러운 현실에서도 동료 병사의 어깨를 붙잡고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숙연하기까지 하다. 높이 2.3m로 실물 크기인 이 작품이 제1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기념비적 광경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1차 대전 이후 화학무기가 전면적으로 사용된 경우는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독일과 연합군 모두 신경가스와 같은 더욱 치명적인 화학무기를 개발했지만 사용하지 않았다. 국제법의 인도주의적 규범 때문이 아니라 보복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결국 가스전의 역사는 결국 더 큰 보복의 위협이 없다면 사용할 수 없는 무기란 없다는 전쟁의 숙명을 역으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인 것이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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