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의 칭기즈칸 따라 2500Km<23>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자”
확신할 수 있는 내가 필요했고,
내 삶에서
납득할 만한 내가 필요했는데
드디어 찾아냈다
얼기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고, 최종 목적지까지 약 150㎞를 남겨 두고 있었다. 우리는 지난 50여 일 동안 약 2350㎞를 달려왔고, 자동차로는 3100㎞ 정도를 달렸으며 말을 탄 지 50여 일이 다돼 간다.
나는 이제 말 위에서 춤을 추고 안장에 뛰어서 올라탈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어떤 시작이 있다 해서 변화가 당장 한눈에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매일매일 노력이 쌓이고 시간이 지났을 때 그 결과들이 서서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번 횡단에서 ‘성공’이라는 단어는 정말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횡단 자체는 처음부터 어렵지 않았을 수도 있다. 군대에서 전역이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듯 말이다.
나는 이 횡단 이야기를 통해서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그것으로 많은 이들이 꿈꾸기를 원했다. 따라서 모험이긴 했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을 잘 타게 되는 것도 정해진 사실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진짜 내 꿈을 찾아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목표였는데, 앞으로 해야 될 것들에 대해서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어느 정도 기른 것 같다.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자.’ 확신할 수 있는 내가 필요했고, 내 삶에서 납득할 만한 내가 필요했는데 결국 찾고 말았다. 그 외 것들은 잠시 접어두자. 내가 주체적으로 살아야지 진짜 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명심해라. 타인의 인생 이야기나 하려고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이 절대 아니다.’
대초원에서 나를 배우다
이틀 후면 더는 말을 타지 않아도 되고 텐트생활도 안 해도 된다. 추위에 벌벌 떨지 않아도 되며 가지 않는 말에게 채찍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 또 밤에 말 도둑 걱정과 오토바이를 끌고 텐트로 찾아오는 몽골 사람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반대로 더 이상 이런 생활을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 거대한 초원에서 말과 하나 되는 것도, 밤마다 은하수를 보는 날도 이제는 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내 생을 걸고 2500㎞를 말을 타고 횡단했으며, 설령 더 이상 말을 타지 않더라도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는다고 말이다. 한번도 보지 못한 칭기즈칸이지만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 대륙을 누비고 달렸을지 상상이 되는 밤이다.
낮에도 입김이 나올 정도로 기온이 뚝 떨어졌다. 그 때문인지 듬직이의 걸음걸이가 힘겹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듬직이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알지만 이틀 남은 상황에서 오늘 달릴 수 있는 데까지 달려보고 판단하자는 생각으로 파이팅을 외치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떨어질 때만 살짝 채찍질을 하면서 고삐로 목을 들어주고 달려가기를 이어가니 불과 10여 분도 안돼 2마일을 달렸다. 그 다음은 20여 분이 걸렸다. 이런 속도로만 달려 준다면 정말 감사하겠지만 더는 이런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의 10마일은 달리는 게 더욱 힘겨웠다. 듬직이의 감정과 생각이 나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뭐든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오랫동안 같은 것을 공유하다 보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마치 같은 생활관 선·후임이 서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것은 사람이건 동물이건 기계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온전히 생각하고, 이해해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그래야 내 주변에 있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나를 둘러싼 세상을 동시에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대 초원에서 나를 배우고 있다.
이제 듬직이의 마음까지 이해돼
점심식사를 준비하면서 듬직이에게도 물과 건초를 주었다. 그런데 퍼다 준 물을 마시지 않는 것이었다. 대야 안에는 큼직한 얼음들이 둥둥 떠 있었고 나는 본능적으로 얼음을 빼주었다. 그제야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와! 동진이 두 달 만에 말 전문가가 다 됐네!”
재웅 형이 말했다. 말은 낯설거나 새로운 것, 혹은 장애물 같은 것들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생명의 어떤 습관이나 행동을 미리 알고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이 진짜 행복이 아닐까.
후브드 마을에 도착했다. 팀원들은 필요한 물자를 사들고 내가 기다리는 마을 어귀로 왔다. 대략 6시쯤 해가 지고 있었다. 어려운 길을 달려온 듬직이는 오전 기력의 10%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듬직이를 위해서라도 멈추기로 했다. 다만 술에 취해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유목민을 피하기 위해 마을에서 약 2마일 떨어진 지점에 텐트를 치기로 했다. 운 좋게도 도착한 곳은 해수욕장 모래사장처럼 고운 모래들이 펼쳐진 곳이었다.
팀원들 말로는 오늘은 물침대에서 잘 수도 있겠다고 표현할 정도로 이번 여행 중 가장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텐트를 치고 듬직이를 차 뒤에 묶어둔 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풀을 통째로 줬다. 듬직이가 과연 끝까지 같이 달려줄 수 있을까? 듬직이가 예상대로 달려주지 못해도 좋다. 우리가 애초에 생각했던 거리보다 훨씬 많이 달려왔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기적이기 때문이다.
기적은 내가 선택하고 창조하는 것
내가 몽골에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 중 하나. 기적은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가 매일매일 선택적으로 창조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힘들다고 포기하면 그것이야말로 일반적인 것이다. 만약 내가 앞으로도 살면서 기적을 만들고 싶다면, 생각한 것을 실행해 나가는 자세를 통해서 매일 기적을 만들면 된다. 힘들지 않은 일은 없다.
우리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생각과 그 생각에서 비롯되는 감정 자체를 스스로 조절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즐겁고 재미 있고 신나는 일이라고 인식을 전환하게 되면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깨닫지만 우리는 만물을 존재 자체로 바라볼 줄 알아야 된다. 그 자체에 우리의 생각이 입혀지고, 그 위에 감정이 입혀지는 순간 모든 것을 본질이 아닌 껍데기로 바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를 보자.
하루를 더 달리기로 한 시점. 우리가 앞으로 달릴 거리는 107㎞ 정도가 남았다. 속도를 내서 달릴 때보다 힘겹게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것이 육체적·정신적으로 100배 이상 힘들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기적이지만 듬직이와 마지막까지 달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갖고 있는 마지막 소원일 것이다.
청년모험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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