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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특집] 쏟아지는 포화 속에서도…종군화가들, 예술혼 태우다

맹수열

입력 2015. 06. 24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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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으로 피란 못한 미술가들

강제로 ‘조선미술총동맹’ 가입

선전화 그리는 데 동원되기도

 

피란 나선 이중섭, 은박지 그림

종군화가들은 전선·초상화 그려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은 그 시대를 산 모든 이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한국의 근현대 미술가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이가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헤어지고 삶의 터전을 버려야 했듯이 미술가들도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선택을 해야만 했다. 해방 직후 평양과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미술가들은 엎치락뒤치락하는 전쟁의 양상에 따라 저마다 남, 혹은 북으로 향했다. 전쟁을 온몸으로 경험했던 미술가들은 그 참상을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시켰다.



   ●예술가, 선전도구로 전락하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은 전쟁 발발 사흘 만에 함락됐다.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남쪽으로 떠났지만 그러지 못했던 이들도 부지기수였고 이 가운데는 유명 화가들도 있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은 ‘서울시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여기에는 ‘조선문화단체총동맹’도 포함됐고 그 산하에는 미술가들로 구성된 ‘조선미술총동맹’이 있었다.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한 김환기·박고석·유영국·이쾌대 화백 등 수많은 미술가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이곳에 가입해야만 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명동 마루젠 백화점에서 선전화를 그리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전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피란을 떠난 화가들도 수난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중섭 화백의 스승으로 알려진 임용련 화백처럼 피란길에 올랐다가 북한군에 체포된 경우가 대표적이다. 임 화백은 납북 도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되찾은 9월 북한 치하에서 활동하던 일부 작가들은 월북을 선택했다. 조각가 이국전과 박용달, 서울미술제작소 초상화 반장이었던 현충섭, 임군홍, 엄도만, 이순종 화백 등이 그들이다. 특히 이쾌대 화백은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렸던 것이 두려워 북한 인민의용군에 자원 입대했다. 이 화백은 낙동강 전선에서 체포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1953년 6월 포로교환협정이 체결된 뒤 자진해 북한행을 선택하기도 했다.


   ●미술가들의 피란생활

 서울 수복 뒤 북한이 아닌 한국을 선택했던 이들도 한동안 부역행위의 딱지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1951년 1·4 후퇴 이후 부역 논쟁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었다. 대부분의 미술가들은 이때 서울에서 내려와 대구와 부산 등지에 자리를 잡았다. 1950년 12월 원산에서 해군함을 타고 부산에 도착한 ‘국민화가’ 이중섭 화백은 부두노동을 하며 연명했다. 일부는 부산에 위치한 ‘대한경질도기주식회사’에서 접시나 화병에 그림을 그리며 연명하기도 했다.

 피란생활은 궁핍했지만 예술가들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이 화백은 가극의 소도구를 만드는 일을 도우면서도 틈틈이 연필과 못으로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림 도구를 구하기 어려웠던 당시 상황에도 불구하고 폐품을 이용해 창작활동을 이어가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군복 입은 화가들…종군화가단 탄생

 전국 각지에서 모인 피란민들로 부산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은 가장 훌륭한 신변보장 수단이었다. 많은 미술가가 종군화가단에서 활동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전쟁 직후 많은 예술인이 자발적으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구국대’ 등의 이름으로 종군활동을 했다. 1950년 조직된 ‘문총구국대’에 속했던 우신출 화백은 육군3사단 22연대에 배속, 함경남도 원산까지 북진하기도 했다.

 1951년 2월 장발·이마동 등이 중심이 돼 정식 종군화가단인 국방부 종군화가단이 창설됐다. 이어 6월 부산으로 본부를 옮기면서 이마동(단장)·김병기(부단장) 화백 등 50여 명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이들은 전선을 시찰하고 종군일지를 작성하며 스케치를 했다. 가끔은 지휘관의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부대마크를 만들어주는 ‘부업’을 하기도 했다. ‘열쇠부대’로 유명한 육군5사단의 마크는 이준 화백의 작품이다.

 국방부 종군화가단이 활동하면서 육·해·공군도 각자 종군작가단을 운영했다. 예술가들이 본격적으로 군과 보조를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종군화가들의 작품 가운데 일부는 부산과 대구 등지에서 개최된 전시회에 출품되기도 했다.


   ●치열했던 미술가들의 삶, 재조명돼야

 1953년 7월 27일 3년에 걸친 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되면서 미술가들도 서울로 돌아왔다. 전쟁통에 변변한 작품활동을 하지 못했던 이들은 재건되는 서울처럼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미술가들은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종군화가로, 피란민으로, 혹은 월북자로…. 선택은 저마다 달랐지만 그들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예술이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또 시대의 눈이 되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을 지낸 미술평론가 정준모 씨에 따르면 전쟁 당시 제작된 전쟁화·전투화는 300여 점으로 추산되지만 지금은 대부분 소실됐다. 6·25 전쟁 자체가 젊은 세대들에게 점차 잊혀가는 것처럼 전쟁 당시 미술가들의 삶도 잊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호국선열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당시를 기록했던 미술가들 역시 재조명돼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사실이다. 


[참고자료]

  한국미술, 전쟁을 그리다-화가들이 기록한 6·25(정준모) /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최열) / 북조선미술동맹에서 종군화가단까지(윤범모) / 월북화가 이쾌대의 생애와 작품(신세계미술관)/ 이젠 모두 지나가 버린 얘기니까 괜찮습니다 - 이남덕 여사 인터뷰(유준상)

맹수열 기자 < guns13@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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