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허중권교수의 고대전쟁사

전투력 소모 많은 공성전강력한 무기가 필요했다

입력 2015. 06. 10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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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무기체계(Ⅴ) - 공성무기 및 수성무기


 삼국이 운용한 공성무기

기록상 단 한 차례만 언급

수성무기 포노·철질려·노포 사용

중국서 사용한 다양한 무기들

삼국 전쟁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

 

 


 

 

 손자는 ‘손자병법’ 작전 편에서 “성을 공격하면 전투력이 많이 소모되므로 주의해야 한다”라고 했고, 모공 편에서는 “최상의 전쟁 수행 방법은 적의 전쟁 의도를 깨뜨리는 것이요, 그다음은 적의 동맹관계를 끊어 적을 고립시키는 것이요, 그다음은 적의 군대를 쳐 무너뜨리는 것이다. 가장 좋지 않은 방법은 성을 공격하는 것인데, 부득이한 경우에만 공성을 해야 한다. 장수가 분을 참지 못해 부하들을 개미처럼 성벽에 기어오르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해서 병사의 3분의 1을 죽게 하고서도 성을 함락하지 못하면, 이는 재앙이다”라고 해 성 공격의 어려움을 강조했다.

 손자가 이처럼 가급적 공성전을 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대 전쟁사를 돌아보면, 방자(防者)가 야외에서의 결전을 회피해 요새와 성으로 들어갈 경우 대체로 전투 양상은 공성전과 수성전의 형태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신라가 국력을 키워 한반도의 중부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450년부터 당군을 축출한 670년대 중반까지 고구려·백제 및 신라가 한반도와 요동 지방에서 벌인 삼국 간의 항쟁과 고구려의 대수ㆍ대당 전쟁 및 나당 간의 전쟁에서는 총 138회의 크고 작은 전투가 치러졌다. 그중 공성전과 수성전 형태의 전투가 85회였고, 야외의 들녘에서 공자와 방자가 대전한 경우는 25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10회 중 6~7회의 빈도로 성을 공격하고 방어하는 전쟁이 치러졌다고 볼 수 있다.

 이번 편에서는 지난번 살펴본 칼·창·활·쇠뇌 등의 개인무기에 이어서 공성전 및 수성전에서 사용된 무기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육도’에는 성을 공격할 때는 분온(??)과 충차(衝車), 운제(雲梯) 및 비루(飛樓)라는 무기를 사용한다고 했고, ‘손자병법’에서는 분온을 대표적인 공성무기로 언급하고 있는데, 당(唐)의 이전(李筌)이 저술한 ‘태백음경’에는 조금 더 자세하게 공성무기들이 기록돼 있다. 예를 들면, 비운지제(飛雲之梯)는 큰 나무로 침상을 만들고 아래에는 바퀴를 붙여 움직이게 했는데, 그 위에 사다리를 세워 그것을 타고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높은 곳에서 아래를 보는 무기라 기록하고 있다. 분온거(??車)는 4륜의 수레 위에 약 10명의 병사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며, 이 수레를 성 아래로 밀어 병사를 성에 접근하게 한다. 거노(車弩)는 수레 위에 여러 발의 쇠뇌를 장착해 성에 접근할 때 발사하는 무기이며, 토산(土山)은 성벽 높이 이상으로 언덕을 만들어 성에 접근하는 무기다. 판옥(板屋)과 목만(木?)은 성으로 접근하는 수레 전면과 위쪽에 나무판과 쇠가죽으로 만든 큰 천을 설치하거나 매달아서 성 위에서 날리는 화살과 돌 등을 막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 전쟁사에서 삼국이 운용한 공성무기 기록은 단 한 차례만 발견된다. 신라 태종무열왕 8년(661) 5월에 고구려군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할 때,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포차(抛車)를 이용해 돌을 성 안으로 날렸는데, 돌에 맞은 성벽과 건물들이 파괴됐다고 한 기록이 그것이다. 당유인원기공비에는 백제부흥군이 운제와 지도를 사용해 나당군을 공격했다고 돼있다.

 한편 수나라가 고구려의 요동성을 공격할 때 비루·동차·운제·충제·지도·어량대도·팔륜누거 등을 운용했으며, 당나라가 요동성과 안시성을 공격할 때도 운제·충차·포차·토산 등을 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수나라가 고구려 공격에 실패하고 철수할 때, 수군이 버리고 간 각종 공성무기들이 억만을 헤아릴 정도로 매우 많았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정규군이 아닌 백제부흥군이 공성무기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미뤄볼 때 고구려·백제·신라의 정규군이 ‘태백음경’에서 언급된 각종 공성무기들을 사용했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고 하겠다.

 ‘태백음경’에는 성을 방어할 때 사용하는 무기인 목노(木弩: 쇠뇌), 지유와 유낭(脂油·油囊: 기름과 기름주머니), 간창(竿槍: 성벽 꼭대기로 오르는 적을 베어내는 창), 지청(地聽: 지하에서 나는 음을 듣는 기구), 철릉과 질려(鐵菱·?藜 : 인마 통행 및 접근 거부를 위한 마름모 모양의 무기), 함마갱(陷馬坑: 말 함정), 거마창(拒馬槍: 말의 이동 및 접근을 거부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여러 개의 창) 및 목책(木柵) 등도 기록하고 있다.

 수성무기 운용 사례를 보면, 신라 진흥왕 19년(558)에 나마 신득이라는 사람이 포노(砲弩)를 만들어 바쳤는데 이를 성 위에 비치하게 했다는 기록이 보이며, 신라 태종무열왕 8년(661) 5월에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은 신라 북한산성의 성주 동타천이 부하를 시켜 철질려(鐵?藜)를 성 밖으로 던져 고구려군의 병사와 말이 다니지 못하게 하고, 노포(弩砲)를 설치해 적을 막았다고 한다.

 한편 신라 진평왕 51년(629) 신라가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할 때, 부장으로 참전한 김유신이 교착된 전투 상태를 깨뜨리기 위해 선두에 서서 활약했는데, 이때 그가 “말을 타고 칼을 빼어들고 참호를 뛰어넘어(跳坑) 적진을 들락날락하면서 적장의 머리를 베어 돌아왔다”라고 표현된 기록이 있다. 따라서 수성무기 또한 공성무기와 같이 중국에서 사용된 여러 무기들이 삼국의 전쟁에서 구사됐다고 볼 수 있겠다.



※연재를 마치며

 올해 1월 첫째 주부터 시작한 연재를 이제 마칩니다. 정보전, 손자병법, 포로, 포상과 처벌, 무기 등 흥미로운 주제들을 택해 한국 고대전쟁사의 속살을 약간 소개했습니다. 장기간에 걸쳐 지면을 할애해준 국방일보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리 것, 우리 전통 및 군대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이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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