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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중공군 전투식량의 필수품 ‘장아찌’

입력 2015. 06. 01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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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짜차이


중국 밥상의 기본 밑반찬

1950년 중공군 부식으로 채택

6·25전쟁 시 1000톤 공급

전후 참전 중공군 병사들

고향 돌아가 널리 퍼트려

 

 


 

 


 

 


 6·25전쟁 때의 중공군 사진을 살펴보면 병사가 등에 괴나리봇짐 비슷한 자루를 가로질러 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대 자루 형태지만 국군의 배낭과 같은 용도다. 중공군 병사의 마대자루에는 6·25전쟁 당시 중공군의 특징이 담겨 있다. 장점이면서 동시에 약점으로 지적되는 부분이다.

 중국 군사과학원 자료에 의하면 1950년 10월 20일 새벽, 먼저 중공군 5개 사단이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한국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것이다. 개입 초기 중공군은 발 빠른 기동력을 선보였다. 한밤중 마대자루 하나 달랑 메고 은밀하게 산길을 이용해 아군 진지로 접근, 기습공격을 했다. 발 빠르고 은밀한 공격으로 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어려움을 겪었다. 병사 각자가 마대자루에 식량과 탄알을 담고 신속히 움직였기에 가능했던 기습공격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공군의 한계가 드러났다. 병참 문제였다. 유엔군이 제공권을 장악했기에 중공군은 낮에는 이동하지 못했다. 도로를 이용한 수송도 불가능했다. 노출되는 순간 폭격을 당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차량이 없었다. 이동 중에는 밤이 됐건 낮이 됐건 불을 피워 취사할 수 없었다. 산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중공군은 마대자루에 각자 먹을 식량과 탄알을 담아 등에 둘러메고 산길을 따라 움직이며 전투를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병사들이 마대자루에 넣어 둘러멘 식량은 대부분 일주일 분량이었다. 전투가 일주일 이상 길어지면 굶주린 상태에서 싸우거나 아니면 식량 확보를 위해 전투를 멈춰야 했다. 자칫하면 굶주림 때문에 부대가 위기에 빠질 수도 있었다. 실제 장진호 전투 때 중공군 제9 병단이 미 해병대를 겹겹이 포위해 놓고도 마대자루의 식량이 떨어져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얼어 죽거나 투항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맥아더 장군의 뒤를 이어 유엔군 총사령관이 된 리지웨이 장군은 이런 중공군의 전투 형태를 파악했다. 그는 마대자루의 식량이 떨어지는 7일 이후에는 중공군의 전투가 소극적으로 바뀌는 것을 이용해 방어선을 하나씩 구축하면서 후퇴, 중공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적의 병참 특성을 파악해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장악했던 것이다.

 중공군 마대자루의 식량은 대부분 일주일치였다고 하는데 사실 7일 먹을 양식이라면 그 부피와 무게가 적지 않다. 중공군은 마대자루에 도대체 어떤 음식을 넣어서 다녔을까?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이 볶은 쌀과 콩이었다. 중공군은 전투를 벌이다 식사할 여유가 생기면 보따리를 풀어 볶은 쌀이나 콩을 입에 털어 넣고 눈덩이를 뭉쳐 씹으며 식사를 대신했다. 중국 측에서 말하는 소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즉 6·25전쟁 중 중공군의 급식공급에 관한 논문에 의하면 전방의 중공군에게 공급된 전투식량의 약 16.7%가 볶은 콩이나 쌀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주요 양식 중 하나가 짜차이였다. 이른바 중국식 장아찌다. 볶은 콩이나 쌀, 아니면 우리 만두와는 달리 속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밀가루 반죽을 부풀려 찐 만터우를 짜차이를 반찬 삼아 먹었다. 수분을 완전히 제거한 장아찌이기 때문에 장기 보관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부피가 작아 볶은 콩과 함께 마대자루에 넣으면 일주일 분량을 운반할 수 있었다.

 짜차이라면 옛날 중공군 병사의 반찬이었을 뿐 지금 우리와는 별로 관계가 없을 것 같지만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먹기 시작한 음식이다. 예전 중국 음식점에서는 반찬으로 주로 단무지를 제공했지만, 요즘은 단무지와 함께 혹은 단무지 대신에 중국식 장아찌 짜차이를 내놓는다.

 물론 중국에서는 짜차이가 밥상의 기본 밑반찬이다. 서민들은 특별한 반찬 없이 짜차이와 밥·국수 한 그릇 혹은 만터우로 한끼를 때우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중국에 짜차이가 이렇게 널리 퍼지게 된 계기 중 하나로 6·25전쟁을 꼽기도 한다. 참전했던 중공군 병사들이 전후 고향에 돌아가서 짜차이를 널리 퍼트렸다는 것이다.

 짜차이는 얼핏 수분을 제거한 무를 절였다가 양념한 것 같지만 사실은 겨자 뿌리를 절인 것이다. 12세기 송나라 때 반 건조 상태의 절임채소로 발달했다고 하는데 현대에 들어서는 중국 공산당 군대인 인민해방군의 부식으로 채택되면서 널리 퍼졌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50년 1월,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중공군의 병참지원과 지방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중공군의 부식으로 짜차이를 채택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2년의 경우 1000톤을 중공군 병사의 부식으로 공급했다. 중공군 병사들이 마대자루에 볶은 콩과 짜차이를 넣고 다니며 싸운 배경이다.

 짜장면·짬뽕 먹을 때 단무지 대신 먹는 중국 장아찌로만 알았던 짜차이가 이렇게 뜻밖에도 한국전쟁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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