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알려지지않은 6·25 전쟁영웅

대한민국 운명 가른 5일, 김포지구서 악전고투 (1950년 6월 29일~7월 3일)

입력 2015. 04. 05   11:51
0 댓글

<13> 원치남(元治南) 대위와 오류동 일대 전투


北 영등포 진출 막기 위해 오쇠천 일대서 북한군 공격 저지

15연대와 합류 138고지 탈환…기세 몰아 126고지까지 진격

50년 7월 3일 138고지서 전사…한강방어선 유지 시간 벌어

 

 



 


 

 

 서울 구로구 오류동 지역은 서남부의 요충지 영등포에 이르는 관문이다. 1950년 6월 28일 김포공항을 점령한 북한군 제6사단은 곧바로 오류동·부천 방향으로 진출해 영등포를 공격하려 했다. 북한군이 오류동 일대를 점령한다면 국군의 한강방어선은 측후방이 차단되면서 치명상을 입게 된다. 국군이 오류동 일대의 방어에 사활을 걸어야 할 이유였다.



 ●원치남의 입대와 6·25전쟁 발발, 철수

 원치남(元治南) 대위는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했다. 그는 1948년 8월 9일 조선경비대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장교후보생 제7기로 입교했다. 그해 12월 21일 육군소위로 임관한 그는 제18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원 소위와 제18연대는 대구에서 온양을 거쳐 옹진반도로 이동했다. 그사이 원 소위는 중위로 진급해 제11중대장에 보직됐다. 제18연대는 1950년 1월 옹진지구를 제17연대에 인계하고 용산으로 철수했다.

 원 중위와 제18연대가 용산에서 부대정비와 교육훈련에 임하고 있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시작됐다. 그는 오후 5시에 하달된 긴급명령에 따라 민간차량을 징발해 오후 7시 연대와 함께 용산에서 출발했다. 병력은 대대 전체가 휴가 중인 제1대대를 제외하고, 제2대대 550명과 제3대대 450명으로 모두 1000여 명 정도였다. 오후 9시쯤 의정부 녹양동 일대에 도착해 숙영한 제18연대는 다음날 덕정의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원 중위와 제11중대가 진지 구축을 마칠 무렵인 오후 2시쯤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부연대장 한신 중령이 지휘하는 별동대가 북한군 선두전차를 향해 2.36인치 로켓탄을 집중적으로 발사했다. 그러나 북한군 전차는 잠시 멈칫했을 뿐 진격을 계속했다. 북한군 전차는 괴물이었다.

 제18연대는 순식간에 후방이 차단되고 말았다. 연대장은 대대 단위로 분산해 삼송리를 경유, 행주에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원 중위는 27일 새벽 2시에 진지를 출발했다. 대대장 안민일 소령의 지휘 하에 28일 오전 8시쯤 삼송리에 집결한 후 행주를 거쳐 김포로 철수했다.



 ●김포반도 투입과 오류동 전투

 원 중위와 제18연대가 김포공항 북쪽의 개화동에 도착했을 때는 북한군 제6사단에 의해 김포공항이 점령된 상태였다. 김포 일대의 북한군이 영등포로 직진하면 한강방어선이 유지될 수 없었다. 따라서 김포공항에서 영등포, 또는 안양으로 이어지는 일대의 방어는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는 과제였다. 육군본부는 비교적 전투력이 양호한 상태였던 제18연대로 북한군 제6사단을 저지하기로 하고 임충식 중령을 김포지구방어사령관(이하 김포사)에 임명했다.

 원 중위와 제18연대가 방어하게 될 김포비행장 남쪽에서 오류동·고척동까지의 일대는 서울시 강서구·구로구와 경기도 부천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현재도 비행장 남쪽 활주로 끝 오쇠삼거리에서 오쇠천을 지나 고강선사유적공원까지 일부 시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오류동까지 100m 정도의 횡격실 및 종격실 능선으로 연결돼 있다. 당시에는 전 구간이 연결돼 있어 김포공항을 빼앗긴 국군에게 유리한 방어선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원 중위와 제18연대는 오쇠천 일대, 현재의 경인고속도로와 고강선사유적지 일대에서 북한군 제6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저지했다. 그러나 전차를 동반한 북한군 제6사단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축차적인 방어진지를 점령하며 북한군의 공격을 지연시켰다.

 원 중위와 제18연대는 박처륜(1445~1502, 조선 성종시대 문신)의 묘와 경숙옹주(1483~?, 조선 성종 16남13녀 중 7녀)의 묘가 있는 능선에서 방어하다가 현재의 작동터널과 138고지로 철수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전차를 투입해 6월 30일 138고지를 점령하고 말았다.

 북한군이 138고지를 점령하면서 국군의 한강방어선은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됐다. 절체절명의 심각한 국면이었다. 그에 앞서 6월 28일 시흥지구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문산지구에서 철수한 제5사단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을 김포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한동안 김포사령관은 육군본부가 임명한 제18연대장 임충식 중령과 시흥사령관이 임명한 최영희 대령 2인 체제로 각각 운용됐다.

 제15연대장은 북한군이 138고지를 점령한 상황을 심각하게 판단하고 가용 병력을 총동원해 역습을 감행하기로 했다. 7월 1일 오후 1시 김포사의 병력이 총동원된 역습이 시행됐다. 전투력이 소진된 제18연대는 자연스럽게 제15연대에 합류했다. 원치남 중위가 소속된 제18연대 제3대대도 138고지 역습에 가담해 138고지를 탈환하는 데 기여했다.

 국군이 138고지를 탈환하자 적의 반격이 계속됐다. 원 중위와 제18연대의 잔여 병력은 제15연대와 함께 138고지에서 끝까지 적의 집요한 공세를 저지했다. 이어 7월 2일에는 반격을 계속해 현재의 ‘장안사’(부천시 오정구 고강동)가 위치한 126고지까지 진출해 적의 공격에 쐐기를 박았다.



 ●원치남 중위의 전사

 7월 3일 아침이 되면서 전선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고 말았다. 그날 새벽 북한군 전차가 노량진에서 경부복선철교를 건너면서 북한군의 총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138고지에도 적의 화력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제18연대 제3대대장 안민일 소령과 부대대장 김재후 중위가 파편상을 입었다. 그리고 제11중대장 원치남 중위가 전사하고 말았다.

 원 중위는 비록 138고지에서 전사했지만, 그가 김포지구에서 악전고투하며 북한군 제6사단의 진출을 저지했던 6월 29일부터 7월 3일까지 닷새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갈랐던 기간이었다. 그 기간을 이용해 국군은 한강방어선을 유지하면서, 재편성할 수 있는 시간을 얻어 낙동강방어선까지 적의 공격을 지연할 수 있었다. 또한 유엔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획득할 수 있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원치남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에게 대위 계급을 추서하고 유해를 수습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33-909)하고 있다. 국방부는 한국전쟁사(제1권 365·698쪽)에 그의 활약과 전사 상황을 수록해 그의 전공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전쟁 중 혼란이 계속되면서 그에게는 어떠한 무공훈장도 수여되지 못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