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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 증대 위해 상공 시민 장려...‘짐이 곧 국가’

입력 2014. 11. 18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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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주 교수의 세계사 여행 ⑦ 왕과 귀족이 호령한 세상, 유럽의 절대왕정 시대




 

중세에 등장한 대표적 중형 화포인 봄바아드. 화포의 발달은 중세 축성술을 무력화시켰다. 
필자 제공

 

 

 

   16~18세기를 유럽사에서 ‘절대왕정(Absolute Monarchy)’ 시대라고 부른다. 15세기에 접어들어 지방분권적이던 중세사회가 해체되고 권력이 왕에게 집중되는 절대주의 국가가 등장했다. 중앙집권화 과정을 통해 영국에서는 튜더 왕가,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가, 오스트리아에서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출현했다. 이러한 절대왕정은 중세 봉건국가에서 프랑스혁명 이후 대두하는 근대 국민국가로 나아가는 과도기 역할을 했다. 이 시기 관건은 왕권강화였기에 각국은 경쟁적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대규모 궁전을 건립해 권위의 물적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오늘날 유럽여행 시 단골 방문 장소로 각광받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 영국의 버킹엄 궁전,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쇤브룬 궁전 등은 바로 이러한 절대왕정의 산물이었다.



봉건영주와 교회세력 약화에서 비롯

 

 절대왕정은 지방분권적이던 중세 봉건체제의 붕괴라는 변화 속에서 탄생했다. 14세기가 되면서 중세 사회의 중추였던 봉건영주와 교회의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영지 주변에 형성된 도시의 영향력이 커지고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중세사회를 지탱하던 장원경제가 무너졌다.

특히 14세기 중엽 서유럽을 휩쓴 ‘흑사병’의 여파로 유럽 인구가 급감하면서 노동력 부족현상은 더욱 심화돼 장원경제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설상가상으로 중세의 무력기반이던 기사군의 무장력도 크게 약화됐다. 십자군원정(1092~1270), 백년전쟁(1338~1453) 등을 치르면서 기사들의 수가 감소했고, 무엇보다도 소총과 대포 등 화약무기가 도입되면서 성곽과 기병에 의존한 중세 무기체계의 한계가 드러났다.

 때마침 왕권 강화를 갈망하고 있던 국왕에게 든든한 원군(援軍)이 나타났다. 상업 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상업시민계층이 등장, 왕권 신장을 저해하는 봉건영주 세력을 누르는 데 필요한 재원을 충당해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국왕은 강력한 상비군을 육성해 봉건영주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종국에는 충성을 받아낼 수 있었다. 상업시민계층은 자유롭고 안전한 교역 활동과 통일된 경제권 확립이 가져다 줄 이점 등을 기대하며 국왕과 손을 잡았다. 물론 이러한 국왕과 시민계급의 결탁이 근본적으로 일시적 현상임이 드러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왕권신수설로 통치 기반 마련

국왕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권력의 공고화를 꾀했다. 무엇보다도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정립해 통치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국가, 그것은 바로 나다’라는 호언에서 알 수 있듯이 권위의 근거를 신의 특별한 은총에서 구했다. 이와 더불어 실질적인 통치수단을 확보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관료제도, 조세제도, 사법제도의 정비를 통해 절대왕정의 통치기반을 구축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직접적이고 절실했던 수단은 군사력이었다. 대내적으로는 왕권에 대한 저항세력을 억압하고, 대외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각국은 상비군 제도를 도입하고 경쟁적으로 병력 규모를 늘려갔다. 자연스럽게 전쟁이 빈발하게 됐고 새로운 전략전술 및 무기체계가 개발됐다. 대표적 충돌로 1980년대에 서양 역사학계의 큰 화두였던 ‘군사혁명’ 논쟁을 촉발시킨 30년 전쟁(1618~48)을 꼽을 수 있다.

이 시대에 왕권의 강화는 곧 국력의 신장을 의미했다. 고로 개인의 경제활동에 국가가 적극 개입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상업과 무역을 장려하고 궁극적으로 국부를 증대시키고자 했다. 루이 14세의 재상으로 프랑스를 유럽의 최강국으로 올려놓는 데 크게 기여한 콜베르의 “풍부한 화폐는 국력이다”라는 언급처럼 수출 장려, 수입 억제, 그리고 이를 통한 화폐의 축적은 당대의 공통적 키워드였다.

 이러한 외적 조치들에 더해 절대왕정은 종교 및 문화 활동을 통해 ‘신민의 동질화’를 꾀했다. 종교계의 협조로 국왕의 신적 권위를 고양함과 동시에 일반백성에게 기독교의 교리 준수를 강조하고, 국가종교가 정한 테두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을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응징했다.

한마디로 지배계층의 문화를 일반대중에게 강요해 문화적 일체감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코자 한 것이었다. 국내적으로는 장엄한 각종 의식이나 국가적 행사 거행 및 웅장한 궁전 건축을 통해,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전쟁을 통해 신민의 결속을 다지고 국왕의 영광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했다.



절대왕정 국가의 부침 

절대왕정의 성립 시기는 국가마다 상이하나 등장한 과정은 유사했다. 서유럽의 경우, 맨 먼저 절대왕정을 수립한 국가는 스페인이었다. 8세기 이래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과의 오랜 투쟁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왕권이 강화됐던 것이다. 대항해 시대를 선도한 16세기 동안 절정에 달했던 스페인의 국력은 1588년 영국 침공에 실패하면서 기울게 됐다.

튜더왕조를 개창한 영국은 헨리 8세와 특히 엘리자베스 1세 시대(재위 1558~1603)를 거치면서 왕권강화와 국력신장에 매진, 유럽의 주변국에서 중심국가로 진입했다.

절대왕정 하면 누가 뭐래도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를 꼽을 수 있다. 영국과 벌인 백년전쟁, 국내의 종교전쟁 등을 거치면서 왕권을 확립, 부르봉 왕조를 개창한 프랑스는 ‘태양왕’으로 자칭한 루이 14세의 치세(재위 1643~1715)에 절대왕정의 절정을 이뤘다.

절대왕정이 번성한 16~18세기는 중세 봉건체제에서 근대 시민사회로 발전해 가는 과도기였다. 시민계급의 성장과 더불어 근대성이 점차 확대됐으나, 여전히 국가와 왕조가 동일시되고 군대와 관료는 오로지 국왕에게만 충성하는 ‘왕조국가(Dynasty State)’였다.

이후 성장한 시민계급이 경제력에 부응하는 정치적 참여를 외친 혁명적 사건들이 터지면서 절대왕정은 종곡을 고하게 된다. 하지만 절대왕정이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해 근대 국민국가가 출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중상주의를 통해 상업 활동을 장려함으로써 근대 자본주의 발달에 기여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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