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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서 꽃핀 인본주의 찬란한 문명의 원류되다

입력 2014. 10. 0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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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주 교수의 세계사 여행 ① 서양문명의 뿌리를 찾아서 <상> - 신들의 나라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서 에게 해 패권 차지 … 문화적 융성 이뤄

정치·학문·예술분야 등서 인간중심·지성적 특질 만개

중세·르네상스 거치며 서양 근대화 정신적 기반 제공일

 

 

 오늘부터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가 쓰는 ‘이내주 교수의 세계사 여행’이 매주 연재됩니다. 이 교수는 이 코너를 통해 그리스ㆍ로마 등 고대 서양사를 비롯해 동ㆍ서양의 근ㆍ현대사를 흥미있게 풀어 나갈 계획입니다. 이와 함께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역사적인 사건도 소개해 역사의 의미와 교훈도 들려주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당부드립니다.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은 현대 서양문명의 근원을 서양 고대의 그리스ㆍ로마 문명, 그중에서도 특히 그리스 문명에서 찾으면서 이들 두 문명을 서양의 ‘고전문명’이라 총칭하고 있다. 오늘날 서양 세계를 특징 짓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합리주의 등의 뿌리가 기원전 7~4세기에 그리스 반도에서 등장했던 폴리스(polis, 도시국가)들에서 꽃을 피운 문화적 유산에 있다고 평가한다. 대표적 폴리스였던 아테네(Athens)에서 기원전 4세기경 정치 및 종교, 무엇보다도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만개했던 인간중심적이며 지성적인 문화적 특질은 이후 로마제국과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현재 서양문명을 형성하는 자양분이 됐다.

 오늘날 세계의 중심이 동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표현을 자주 접한다. 그러다 보니 혹자는 ‘유럽 중심주의’를 넘어서자, 아니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서양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 역시 이러한 논의에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다만 문제는 유럽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오늘날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이 ‘유럽의 실상’에 대해서조차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중ㆍ고교 과정에서 ‘세계사’ 교육이 거의 전무(全無)한 지경인지라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공백을 조금이라도 메꾸어 보려는 바람에서 오늘날 서양세계가 걸어온 길을 더듬어 보려고 한다.

 그리스 반도에서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일종의 정치ㆍ군사 공동체였던 폴리스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리스는 에게 해 남쪽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과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미케네 문명을 거쳐서 기원전 8세기경부터 그리스 본토에서 등장한 폴리스를 주축으로 문명의 기반을 다졌다. 이후 빠른 인구 증가와 토지 부족으로 그리스인들은 주변 지역으로 진출했고, 그 결과 기원전 7~6세기경이 되면 지중해 전역에 걸쳐서 수많은 대소 규모의 폴리스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팽창 덕분에 상업 활동이 활성화돼 시민계층의 위상이 점차 높아졌는데, 폴리스 아테네의 경우가 가장 전형적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의 세력 확대는 당시 동방의 강대국 페르시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리스인들이 에게 해 연안 소아시아 지역에 개척한 상업도시들이 번성하면서 페르시아의 경계심은 한계를 넘어 마침내 침략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페르시아 전쟁(492~479 BC)이 벌어진 것이었다. 전력상 열세했던 그리스 군은 중무장 밀집보병대(phalanx)를 중심으로 한 무기체계와 전략전술의 우세를 바탕으로 대승을 거두고 에게 해의 패권을 차지했다.

 페르시아 전쟁 승리로 그리스 세계의 진정한 강자로 부상한 것은 폴리스 아테네였다. 페르시아의 거센 공격을 물리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아테네에서는 페리클레스라는 유능한 정치지도자가 등장해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부흥, 그리고 이에 기초한 문화적 융성을 이루었다. 바로 이 시기에 아테네 시민들은 정치적으로 민주정을 실험하고 파르테논 신전 건축을 비롯한 학문과 예술을 꽃피움으로써 오늘날 서양문명의 초석을 마련했다.

 그렇다면 이때 형성된 그리스 문명의 특징과 그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은 무엇일까? 우선 고대 그리스에서는 ‘인간중심의 문명’이 대두했다.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이 점을 쉽게 엿볼 수 있다. 먼저 폴리스 아테네의 경우 직접민주정치를 채택하고 이를 실천했다. 폴리스의 성년 남자들이 매년 광장에 모여 집회를 열고 한 해 동안 자신들을 통치할 지도자를 선출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종교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인동형(神人同形)’의 신개념을 갖고 있었다. 즉 인간의 완전한 모델로서의 12신을 선정하고 이들을 닮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예술적으로도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에는 인간의 나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많다. 당대인들에게 인간의 육체는 수치의 대상이 아니라 한껏 과시해도 좋은 ‘완전미’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자연스럽게 ‘지성적 문명’이라는 다음 특징으로 이어진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는 인식하에 합리적인 탐구정신이 크게 발현됐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 주변 환경을 논리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연을 관찰해 이 세상의 근원을 물에서 찾은 탈레스를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관찰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겼다. 이는 ‘너 자신을 알라’는 그의 명제에 함축돼 있다. 이후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면서 인간 이성의 관찰 범위는 더욱 확대되고 세련돼졌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 문명은 이후 로마를 거쳐서 서양의 중세로 이어졌다. 하지만 신본주의(神本主義)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중세사회에서는 인본주의(人本主義)에 기초한 그리스적인 요소들은 수면하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중세를 거치면서 잠복해 있던 인간중심적이며 지성적인 특질들은 14~15세기에 발현한 르네상스 시대에 재차 주목을 받았고, 이후 급진전한 서양의 근대화에 중요한 정신적 기반을 제공했다. 오늘날 서양문명의 뿌리를 그리스 문명에서 찾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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