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위도 띠뱃놀이 이종순 인간문화재
뜻밖의 슬픔 간직한 고슴도치 닮은 섬 ‘위도’
위기 때마다 제사 뒤 띠배 보내며 액땜 그 배치기 소리 위도를 감네
우리 선조는 전국 각 곳의 땅이름 하나를 짓는 데도 지형의 생김새나 동물형상 등을 본떠 의미를 부여했다. 전북 부안군에서 가장 큰 섬인 위도(蝟島)는 고슴도치(蝟)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홍길동전의 배경이 된 율도국 모델로도 주목받는 위도는 빼어난 경관과 풍부한 수산물로 살기 좋은 곳이지만 뜻밖의 슬픔을 간직한 섬이기도 하다. 1931년 위도 치도리 앞바다를 강타한 태풍으로 수백 척의 배가 파선돼 600여 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1993년 10월 10일엔 위도 파장금 항에서 격포 항으로 가던 서해페리호가 침몰해 292명이 희생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이런 위기 때마다 위도 주민은 예부터 전해오는 원당(願堂·신당)에 가 제사를 지낸 뒤 띠배를 만들어 바다에 보내며 액땜을 해왔다. 이 원당제와 띠뱃놀이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주민들은 큰 위안을 얻었고 민속학자들은 높은 예술성에 매료됐다. 국가에서는 1985년 2월 1일 위도띠뱃놀이를 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로 지정했다.
위도띠뱃놀이(이하 띠뱃놀이)는 서해 섬사람들의 한과 염원이 포괄적으로 함축된 대표적인 해원굿이자 축제이기도 하다. 고기 잡으러 나갔다 수중고혼이 된 망자의 넋을 천도하는 제의(祭儀)와 더불어 어부들이 만선을 이뤄 무사히 돌아오길 기원하는 신앙심이 담겨 있다. 매년 1월 3일(음력) 행해지는 띠뱃놀이에는 춤과 노래와 신명이 있고 술과 음식도 넘쳐나 위도 주민은 이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위도띠뱃놀이 보존회 주선으로 이날 섬을 찾은 외지인들에겐 숙식이 무료 제공된다. 관광객과 위도 주민이 하나 되는 대동화합의 축제 한마당이 펼쳐지는 것이다. 띠뱃놀이의 절정은 띠배를 먼바다에 보내며 단전음을 꺼내 부르는 인당(仁堂) 이종순(李宗順·80) 예능보유자의 배치기 소리다. 그는 2007년 7월 1일 위도띠뱃놀이의 창(唱)·악사부문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
‘닻 캐라! 예에~ 노 저어라! 예에~ 돛 달아라! 예에~/ 어기여차 닻 둘러메고 칠산 바다로 돈 실러가자 예~어야~/ 칠산 바다 들어오는 조기 우리 배 바장에 다 떠실었다/ 우리 배 선장 신수 좋아 오만 칠천 냥 벌어서 왔단다.’
“띠배 안에는 선원을 상징하는 허세비(허수아비)와 동·서·남·북·중앙의 5방위 제액을 물리치는 제웅(짚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이 자리하고 만선을 뜻하는 오방색 돛대를 답니다. 음식도 가득 실어 용왕님께 바치고 마을의 모든 부정·슬픔·두려움을 가져가 달라고 지성으로 빌지요.”
위도는 부안 격포항에서 40여 리 떨어진 천혜의 경승지로 그 유명했던 칠산 조기어장의 중심지였다. 본래는 부안군 소속이었는데 1896년 이후 영광군에 속했다가 1963년 부안군으로 다시 편입됐다. ‘영광굴비’의 명성은 이때 얻어진 것이다. 연평도·흑산도·위도 파시(波市)가 서해의 3대 어장으로 명성을 날렸으나 현재는 조기어획량이 줄어 멸치잡이와 김 양식을 주업으로 하는 한적한 어촌으로 변모했다.
띠뱃놀이 역사는 서해에 조기어업이 활성화된 시점과 위도 주민의 입도 시기를 감안할 때 200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인당은 띠뱃놀이의 발상지인 위도면 대리에서 나고 자랐고 그곳에 뼈를 묻겠다고 말했다. 그는 어릴 적 굶주림을 참지 못해 굿당과 용왕제를 쫓아다니다 찬밥과 언 떡을 먹으며 보고 들은 게 띠뱃놀이의 구성진 소리와 꽹과리 장단이었다고 기억한다.
“아버지(이봉욱)는 어린놈이 공부는 안 하고 굿당에나 넘나든다며 매질도 했지만, 어머니(백순덕·100)는 도둑질만 빼놓고 다 배워 배곯지 말라며 우셨어요. 그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자식을 몰라보니 뼈가 저리도록 슬픕니다.”
인당은 띠뱃놀이 전 과정을 10세 때 마을의 이효동 백형기 이복동(위도띠뱃놀이 초대 인간문화재) 어른을 만나 본격적으로 배웠으니 어느덧 70년 세월이라고 회고한다. 위도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육지로 진학하는 친구를 보며 실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스스로 운명임을 깨닫고 예인 활동에만 전념해 왔다. 인당의 창과 꽹과리 장단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려 1978년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서 위도띠뱃놀이가 대통령상을 받게 했고 1985년에는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냈다. 이제 그는 띠뱃놀이를 지켜낸 독보적 전통예인으로 당당하게 우뚝 섰다.
띠뱃놀이는 ①모임 굿·마당 굿 ②동편 당산제·원당 오르기·제물차림 ③독축과 원당 굿 ④띠배와 제웅만들기 ⑤주산 돌기 ⑥용왕굿 ⑦띠배 띄우기 ⑧대동놀이의 여덟 과정으로 봉행되는 바다 굿이다. 해난사고가 잦은 어촌에서는 자연을 믿고 숭배하는 제의식이 다양했는데 동해안과 남해안도 별신굿이란 이름으로 국가에서 그 예능을 보호, 전수하고 있다. 이중 띠뱃놀이는 단출한 악기구성과 간결한 비나리가 원시 굿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민속학계서 주목하고 있다. 육지와 단절된 섬지역의 특성으로 변형이 덜된 것이다.
위도 주민의 액운은 물론 띠뱃놀이 현장에 참여한 관광객의 걱정·근심까지 실어 나르는 띠배는 띠풀·짚·싸리나무를 엮어 길이 3m 폭 2m 크기로 만든 모형 배다. 대리 바닷가에서 용왕굿을 끝낸 띠배는 4~5척의 호위를 받는 모선에 이끌려 바다 가운데로 나간다. 이때 모선에는 주민들이 승선해 풍장소리와 함께 배치기 소리 술배소리 가래질 소리 에옹소리 등을 목청껏 내지르며 띠배가 멀리 사라지기를 기원한다.
“위도띠뱃놀이는 미신도 기복도 아닌 오로지 정성입니다. 부모에 대한 간절한 효심이 하늘에 닿아 징험을 보듯 인간의 간구를 통해 초월적 존재를 감동시키는 것이지요. 세계 각국 관광객들이 띠뱃놀이를 지켜보고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될 때마다 큰 보람을 느낍니다.”
이런 띠뱃놀이의 전승 예맥은 위도 출신 세습무의 대가 끊기면서 위기를 겪고 있다. 초대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던 조금례(1917~1995) 무녀가 사망한 뒤 육지의 강신무를 초빙해 원당제를 지냈지만, 원형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띠뱃놀이를 꺼리는 특정종교의 배타심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현재 장구·화주 부문의 김상원(82) 인간문화재와 장영수(꽹과리·띠뱃놀이 보존회장)·장순섭(북) 전수조교가 있다.
인당은 “수년 전 작업 중 다리 골절상을 입었지만, 정월 초사흘만 되면 없던 힘이 절로 솟는다”면서 “띠뱃놀이 1세대가 떠나기 전 후계자를 양성해 소중한 예맥을 잇겠다”고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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