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사업 40주년 특집 기획 ‘율곡사업을 말한다’ <1> 오 원 철 전 청와대 경제2수석
미 고위관계자 “월남 같은 농업국은 버릴 수도 있다” 언급
공업국가 되면 ‘미·소 워 밸런스’ 유지 차원 미군 유지 판단
창원공단 견학 미 하원 방문단 “우방 한국은 미 국익” 회견
올해는 우리 군의 실질적 전력증강 사업, 즉 ‘율곡사업’이 추진된 지 40주년이 되는 해다. 율곡사업은 1974년부터 1992년까지 3차에 걸쳐 진행되며 우리 군의 자주국방 기틀을 마련하고 현재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군대로 성장할 수 있는 초석이 됐다. 하지만 세월과 함께 율곡사업은 잊혀지고 심지어 오해의 대명사로 회자되기도 한다. 이에 국방일보는 율곡사업의 추진과 진행에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인사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에 대해 재조명하는 시간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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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방위산업을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오원철(86) 전 청와대 경제2수석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생전에 그를 ‘오 국보(國寶)’라 부를 만큼 아끼고 중용한 오 전 수석은 우리나라 중화학 공업과 방위산업 추진 업무를 전담하며 그 기반을 다졌다. 오 전 수석은 80대 중반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국가 경제와 방위산업 육성 초기의 배경을 생생한 기억으로 전했다.
● 주한미군 철수 막기 위해 중화학 공업과 방위산업 시작
오 전 수석이 밝히는 중화학 공업, 특히 방위산업의 추진 계기는 다소 뜻밖이다. ‘자주국방’이라는 상식과는 거리가 있다. 오 전 수석은 ‘미군 철수 방지’를 위한 방편이라고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안보상황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한다. 1968년에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인 1·21 사태가 발생했고 그 이틀 후에는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 호가 납치됐다. 같은 해 11월 2일에는 북한의 특수 게릴라 병력 100여 명이 울진과 삼척에 침투했다. 이후에도 북의 도발은 계속됐다.
이런 와중인 1970년 7월 6일 닉슨 행정부가 주한 미군 1개 사단 철수를 공식 통보하고 1971년 3월 27일 미 7사단을 철수시킨다. 한국 정부가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했다.
“그때 미 고위관계자가 김정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얘기한 것이 있어요. 미국은 일본 같은 공업국에서는 철군하지 않지만 베트남이나 한국과 같은 농업국은 버릴 수 있다는 것이죠.”
주한미군의 철군을 막기 위해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해답은 중화학과 방위산업의 육성이었다. 이른바 ‘워 밸런스’의 개념이다. 한국에 미소 간 힘의 밸런스에 영향을 줄 만한 공장을 건설하면 주한미군의 철군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만약 일본이 공산화된다고 가정한다면 공업이나 무기 정비 능력 등의 수준으로 볼 때 미국과 소련 사이의 워 밸런스가 당장 깨지는 겁니다. 미국이 일본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이유죠. 우리도 한국을 잃는다는 것은 군사적으로 마이너스라는 사실을 미국이 인식하게 해야 했어요. 그것이 바로 방위산업, 중화학 공업이라 생각했지요.”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창원공업단지는 이후 미 하원의원들의 연이은 방문과 함께 철군 반대 논거의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1978년 주한미군 철군의 최종 검토를 위해 미 하원 군사위원회에서 멜빈 프라이스 위원장을 대표로 한 13명이 현지 확인반을 구성해 창원을 방문했어요. 그런데 공단 견학 후 굉장히 심각해지더군요. 대규모 병기창을 보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더라고요. 이곳이 북으로 넘어갈 경우 후폭풍에 대해 걱정한 것이죠.”
미 하원 현지 확인반은 귀국 전 김포공항에서 “한국은 이미 자기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겼으므로 우방으로 남겨두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할 것이라 (미) 정부에 보고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하고 떠났다. 이후 1979년 방한한 카터 미 대통령은 귀국 후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다.
● 각종 율곡사업계획 보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사인
1971년 11월 10일은 우리나라의 경제와 방위산업에 있어 역사적인 날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정렴 비서실장, 오 전 수석과 회동을 가진 후 중화학 공업과 방위산업의 동시 추진이라는 방위산업에 관한 기본 방침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11월 10일 청와대 3자 회동’이다. 오 전 수석은 “이 날이 대한민국의 방위산업뿐만 아니라 이후 율곡사업과 중화학공업화로 이어지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공업구조 개편과 산업혁명의 출발점이 된 역사적인 날”이라고 회상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회동 후 방위산업 및 중화학 공업을 관장하는 ‘경제2수석비서관’을 신설한다. 오원철 당시 상공부 차관보를 차관급 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한 후 강력한 경제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했다.
오 전 수석은 박정희 대통령의 선견지명과 추진력, 그리고 업무 투명성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율곡사업과 같은 대규모 한국군 현대화 사업에 있어서도 철저한 절차와 투명성으로 비리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단언한다.
“방위산업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은 지대했어요. 조그마한 무기 도입에도 본인이 직접 사인을 했으니까요. 관여 정도가 아닌 직접 결정이나 마찬가지였죠.”
당시 율곡사업은 군사기밀로 예산당국과 국회심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5인 위원회’의 심의와 특명 검열단(1976년 5월 설치)의 감사업무로 철저하게 관리했다. (2010년 발행된 국방정책연구 제26권은 이 과정을 율곡집행단이 사업계획서를 상정하면 국방차관, 합동참모본부장, 군수차관보, 국방과학기술연구소장, 경제2수석 등 5인위원회가 심의·의결한 후 국방부장관, 국무총리, 대통령의 재가를 받으면 율곡사업단이 사업을 추진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직접 대통령 결재를 받아야 했던 오 전 수석은 군으로부터 수많은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대통령이 사업을 반려하면 마치 오 전 수석이 반대해 무산된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마치 일반 회사에서 사업부서과 주요 중역들에게 보고한 후 회장에게 최종 브리핑을 하는 과정과 같은 것이죠. 문제는 내가 직접 대통령 결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군에선 대통령 거부 사안을 마치 내가 중간에서 장난을 친 것으로 오해하더라고요.”
오 전 수석은 신군부 집권 후 당한 고초도 이러한 악역(?)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추정한다. 신군부 집권 후 오 전 수석은 감시와 통제로 약 10여 년간 정상적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외국에서 무기 구입 시에도 중간 로비스트의 개입여부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구매 현장에 군 법무관을 대동시키는 방법을 통해서다.
“군 법무관이 판매측 법무관계자를 만나 직접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했어요. 계약서에 만약 뇌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 판매 측에서 모두 책임지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에 무기를 구매할 때 뒷돈 문제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죠. 한국 내에 있는 무기 로비스트도 모두 내쫓았어요.”
오 전 수석이 기억하는 박정희 대통령은 북의 남침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연구하는 지도자였다. 청와대 응접실에는 남북한 병력 대치 현황이 상세하게 적힌 가로 1.2미터 세로 2.5미터가량의 대형 한반도 지도가 걸려 있었다. 전쟁연구를 위한 지도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항상 이 지도를 보며 전쟁연구를 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고 전투 지휘를 할 수 있었던 거예요. 지금도 누군가 반드시 전쟁연구를 해야만 전시에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어요.”
현재의 방위산업 성장에 기여한 인물로는 당연히 박정희 대통령을 제일 우선으로 꼽았다. 그럼에도 초창기 한국과학자들의 공도 잊지 않았다. 오 전 수석은 “당시 과학자들은 지시가 내려오면 밤을 새우고 연구를 지속해 성과를 내곤 했어요. 그들의 노력이 고마웠습니다”라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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