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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CIA 산하 ‘영도유격대’ 함경도까지 내집들듯

윤병노

입력 2014. 06. 2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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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의 또다른 전쟁 ‘유격전’


 

 

 

1951년 미군도 유격대 지원 제8240부대 서해안 방어 성과

첩보활동 주력한 켈로부대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큰 기여

 

▲ 제8240유격부대와 영도유격대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은 북한군에 밀리는 아군의 압력을 덜어주기 위해 비정규전 부대 편성을 계획했다.

 ‘한국전쟁의 유격전사’(군사편찬연구소 발간)에 따르면 미군이 유격대 활동에 구체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한국 해군이 서해안 도서에서 공산군에 대항하는 유격대 활동을 알리고, 탄약지원을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미군은 1951년 1월부터 서해안으로 탈출한 자생 의용군들을 유격대로 활용했다. 백령도 ‘레오파드(Leopard) 기지’, 강화도 ‘울팩(Wolfpack) 기지’, 주문진 ‘커크랜드(Kirkland) 기지’ 등을 조직화했다. 미 극동군사령부는 1951년 7월 이들 유격부대를 제8240부대로 통합·운용했으며, 1953년 초에는 규모가 2만 명이 넘었다.

 서해안을 담당한 동키 1~15·20~21부대, 울팩 1~8부대와 동해안 유격부대 커크랜드·아밴리(Avanlee)·스톰(Storm)·토치라이트(Torchlight), 부산 베이커(Baker) 기지를 확대 재편한 제1공수유격연대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유격부대는 평안도·황해도·함경도 등지로 출동해 북한군과 중공군 진지 습격, 지하조직 구축, 피란민 및 추락 조종사 구출, 무기 노획 등 다채로운 작전을 수행했다. 또 서쪽으로는 압록강 하구에 있는 대화도, 동쪽으로는 원산 앞바다를 장악해 항공정찰만으로는 파악이 어려운 북한 지역 군사시설이나 군대 이동 상황·규모 등의 정보를 획득했다.

   제8240부대의 전투·정보수집 활동 결과는 미 8군의 서쪽 측면 방어를 지원해 주저항선에 있던 북한군과 중공군의 분산을 가져오는 결과로 이어졌다. 더불어 서해 연안 도서를 방어할 수 있었으며, 정전 이후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 5개 섬을 차지하는 밑거름을 제공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유격대를 운용했다. 부산 영도에 본부와 훈련장을 둔 ‘영도유격대’가 그 주인공이다. 부대는 정전 후에도 문서가 공개되지 않아 어느 기관 소속이었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베일에 가린 유격대였다. 자원자 1200여 명을 중심으로 1951년 3월 극비리에 창설했다. 이들은 3~4개월 동안 특수훈련을 받고 강원도 일대와 함경남·북도까지 공중·해상 침투해 비정규전 임무를 수행했다.

 ‘Y부대’ ‘파라슈트 부대’ 등으로도 불렸으며 적 사살 4800여 명, 무기류 노획 1100여 건, 군사통신 시설 파괴 855곳 등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52년 12월 정전협상 분위기가 무르익자 부대를 해체했다.

 미 극동군사령부는 1949년 6월 1일 정보참모부 산하에 일명 ‘켈로부대’로 불리는 주한연락처(KLO : Korea Liason Office)를 설치해 첩보활동을 해왔다.

 이들은 6·25전쟁 때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결정적이었던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상륙작전을 펼치기 하루 전인 1950년 9월 14일 인천 앞바다 팔미도에 상륙해 등대 항해등을 점화한 것. 이를 통해 미군 함대가 항로를 안전하게 통과했다. KLO부대원들은 교육훈련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북한 지역으로 침투해 수만 건에 이르는 첩보를 수집, 전략수립과 전투수행에 단단히 한몫했다.

이렇듯 한국인 유격대와 공작대의 뛰어난 활약은 6·25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자양분이 됐다. 이들은 계급도, 군번도 없이 남북한 곳곳에서 구국의 일념 하나로 목숨을 바쳤다.

윤병노 기자 < trylover@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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