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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 년 이어진 삼국통일전쟁기 백성들의 삶은 고통뿐이었다

기사입력 2014. 06. 18   18:29

<111> 나당전쟁 발발 당시 신라사회

 

 

 

 

 나당전쟁은 단숨에 벌어진 것이 아니라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뀔 때 온기와 냉기가 조금씩 밀고 당기다가 어느새 추위가 엄습하는 것처럼 일어났다. 670년 초 신라 고위 상층부에서 대당전쟁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 당이 세계 초유의 강대국이기도 했지만 신라의 전쟁 여력이 그만큼 고갈돼 있었다. 당시 신라는 물속에서 간신히 머리만 물 밖으로 내놓고 있는 사람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익사는 간신히 모면하고 있었지만 커다란 파도가 다시 몰려온다면 죽을 것이 틀림없었다. 신라의 전쟁수뇌부는 고민에 잠겼다.

 신라의 삼국통일전쟁기라는 시대를 돌이켜 볼 때 숙명적인 어두움이 감돈다. 국가는 70년 이상 백성들을 짜냈고, 백성들은 빈곤을 감수해야 했다. 그 장기간의 전쟁과 착취 그 자체도 기적이지만 그것을 견뎌낸 백성들은 그보다 더한 기적이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전장에 끌려가 군복무를 해야 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뼈 빠지게 일하다가 마흔도 되기 전에 죽었다. 그것은 매일 아침 하늘에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착취의 질곡

 신라 백성들은 국가와 귀족관인에게 이중으로 착취당했다. 그들은 국가에는 현물을 납부하고, 귀족에게는 노동(力)으로 세금을 대신했다. 신라국가는 귀족관인들에게 땅(職田)과 일반 백성들을 차출해 자신의 경작지에서 사역시킬 수 있는 권한(力祿)을 주었다. 물론 동원할 수 있는 민들은 국가가 정해 놓고 있었고, 백성이 그 역을 면제받으려면 귀족관인에게 물질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역록을 부담진 자들은 귀족관인의 집에 특별한 행사가 있으면 약간의 식사를 대접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들판에 몰아치는 차가운 바람과 쓰린 어깨를 찔러대는 무거운 쟁기의 하중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의무 노동 시간이 두 배 넘게 늘어나는 수확기에는 따가운 햇볕 아래서 12시간이 넘도록 일해야 했다. 해가 진 뒤에야 귀가할 수 있었고, 한밤중에 집에 도착해 초가집 좁은 방에서 식구들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쓰러져 잠이 들었다. 예고된 죽음의 그림자는 아버지의 절뚝거리는 다리에도, 어머니의 굽은 등에도, 마을 사람들의 삭은 얼굴에도 깃들어 있었다. 옷은 누더기였고, 하절기에는 신발 신은 사람이 드물었다.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에도 손으로 직접 만든 짚신을 겨우 신을 정도였다. 먹을 것은 보리·콩·피 정도였고, 쌀을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대부분이 굶주렸고, 의심할 나위 없이 영양실조 상태였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직후인 669년 문무왕은 전쟁에서 죽은 자와 공을 세운 자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고 대규모 사면을 단행했다. ‘삼국사기’를 보자. “(짐은) 아직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을 생각할 때 마음이 편치 않아 이에 사면을 단행한다. 도적은 단지 그 몸만 석방하되 재물을 갚을 수 없는 자는 징수하지 않는다.” 당시 도적은 생존을 위협받는 농민들의 극단적인 저항이었다. 이들에게는 배상할 능력이 없었다. 특별사면으로 그들은 풀려났고, 원주인에게 배상을 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그해 한 해에 한한 것이었다. 사면이 단행됐다는 것은 당시 신라 사회에 사면되지 않으면 집행됐을 형률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국가의 형률 집행을 앞둔 죄수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도적은 사면에도 불구하고 결국 재물 원주인의 예속노동력이나 노비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재물의 원주인은 국가나 귀족층이었다. 신라에서 도적의 경우 3배에서 10배에 이르는 고율의 혹독한 배상을 해야 자신을 살 수 있었다. 지배층은 수탈자였고, 나아가 국가는 그것을 법제화시켜 용인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귀족들의 방대한 생산물은 국왕의 요구에 의해 전비로 전용됐다. 신라국왕은 귀족들에게 전비 부담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어지는 기록을 보자. “백성이 빈한하여 타곡을 빌린 자로서 수확이 좋지 않은 지역에 있는 자는 이자와 본곡을 모두 갚지 않아도 된다. 만약 수확이 좋은 지역에 있는 자라면 금년 추수에 그 본곡만 갚고 이자는 갚지 않아도 된다.”



 국왕의 공채와 귀족의 사채

 신라에서는 사채가 귀족들이 재산을 축적하고 노동력을 확보하는 합법적 수단이었다. ‘신당서’를 보면 신라의 귀족들은 방대한 토지, 방목장, 수천 명에 달하는 노비를 소유하고 있다. 국가기관이나 국왕 역시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공채를 통해 예속노동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국왕의 공채와 귀족들의 사채는 국가의 재생산을 지탱하는 버팀목이었다. 전 국민의 상당 부분을 노예화해 부려야 했고, 그 숫자도 일정 수준을 유지해야 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국가의 공채와 귀족의 사채였다. 백성들은 국가에서 부여한 병역을 지속적으로 짊어져야 했고, 중세도 어김없이 납부해야 했다. 굶는 사람들과 아사자가 속출했고, 백성들은 귀족들에게 언제나 고리의 곡식을 빌려 먹었다. 그것은 만성적이었다. 귀족들은 백성들에게 고리의 이자를 받았고, 빚을 갚지 못한 자는 노비가 돼 평생 사역을 당해야 했다.

 당시 농업생산성 자체가 불안정하고 생산력이 낮아 농민의 상당수가 공사채에 의존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했다. 신라의 농민 상당수가 농경의 주체로 자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라는 노예들의 거대한 작업장이었고, 국왕이 그들의 주인이었다. 신라의 전쟁 동원 능력은 실로 여기서 나왔다. 가렴주구의 꼭대기에는 언제나 국왕이 있었다.

 671년 당나라의 장군 설인귀가 승려 임윤 편에 신라 문무왕 앞으로 보낸 편지가 ‘삼국사기’에 있다. 이를 보면 “한쪽 모퉁이 땅 구석진 나라에서 집집마다 군사를 징발하고 해마다 무기를 만들어, 과부들이 군량의 수레를 끌고 어린아이가 둔전(屯田)을 경작하기에 이르렀으니”라고 신라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고대의 신라인들에게는 우직함이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욕망을 주장하는 것을 가능한 한 억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으리라. 물론 개인적인 자아 존중 따위는 개념조차 없었고, 개성은 철저히 무시됐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신라사회는 개인으로부터 그 자유를 빼앗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는 아직 ‘개인’이란 관념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아직도 근원적인 결연관계에 의해서 외부와 결합돼 있었다. 만성적인 전쟁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미학적인 죽음을 기다리는 화랑

 고구려·백제에 대한 적개심은 분명 신라가 전쟁을 지속하게 하는 유용한 정신적 자산이었다. 당시의 도의란 무사도(武士道)였다.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신명을 돌보지 않는, 무엇보다 전사를 명예로 여기는 무사정신이 넘쳤다. 신라는 전쟁이 지속되던 시기에 자라난 청소년들을 모아 ‘화랑’ 조직을 만들게 했다. 화랑도는 진골귀족을 비롯해 왕경 내의 하급귀족, 평민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사회계층을 망라해 조직된 청소년 단체였다. 그것은 신라국가가 겁없는 청소년들을 전장에 동원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전쟁이 지속되던 시기에 태어난 어린아이들은 청년이 되기 전에 시대가 강요한 무술을 자연스럽게 연마했다. 삶에 대한 집착이 많지 않은 소년들은 전쟁터에서 어떻게 장렬하게 죽어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길 것인가 고민했다. 전사해 이름을 남긴 선배 화랑들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화랑들은 순국지상주의자들이었고, 백성들의 국가수호정신 진작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야말로 살벌한 군국주의시대였다. 사회의 최상층도 예외가 없었다. 진골귀족들조차 전쟁터에서 자신의 어린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백성과 군사들은 고귀한 진골의 피를 원했다. 그들의 죽음이 회자돼야 백성들은 자신들의 고난을 잊을 수 있었다. 진골의 피는 백성들의 불행을 잊게 하는 ‘마약’이었다. 최상층의 희생 없이는 아무도 따르지 않는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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