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이동진의 지구 한바퀴

軍서 다진 체력·정신력, 인생 도전을 시작하다

입력 2013. 12. 1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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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 청년 이동진의 히말라야 등정기<상>


 ‘이동진의 지구 한바퀴’가 지난 6일자를 마지막으로 약 17개월 63회의 연재를 마쳤다. 한 젊은이의 도전과 깨달음에 장병과 독자들의 박수가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그와 같이 도전을 꿈꾸는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을 위해 이동진 씨가 군대 전역 후 첫 번째 도전했던 히말라야 등정기와 오지탐사대 지원 노하우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입대 전 히말라야 오지탐사대 모집지원에 ‘쓴 맛’ 해병대 전역 앞두고 합격 ‘곤도고르’ 대장정 돌입

 

곤도고르 정상을 향해 힘차게 등정하고 있는 오지탐사대원들과 곤도고르 정상을 향해 출발 전 탐사대원들이 성공을 기원하는 모습(아래 원).

 히말라야가 나를 부른다

 “숨소리마저 용맹한 젊음 어디 없습니까?” 대학교 2학년이던 지난 2008년. 우연히 학교 게시판에서 ‘오지탐사대 모집’ 공고와 마주쳤다.

 오지탐사대는 대한산악연맹이 주관하는 프로그램으로 20대를 대상으로 3차례의 테스트(서류·체력 및 면접·아웃도어 종합 테스트)를 통과한 대원들을 전 세계 오지로 보내는 것이다.

 대학 입학 후 마라톤과 철인3종 등으로 체력에 자신이 있던 나는 서슴없이 지원했고, 마지막 관문인 2박 3일 종합 아웃도어 훈련에 참가했다. 20명 씩 5개 팀이 만들어졌고 그중 절반만이 합격하는 최종 관문에서 나는 쓰디쓴 탈락과 함께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훈련소와 자대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웠다. 하지만 ‘깡’이 생겼고, 버티다 보니 강한 정신력이 다져지는 것을 경험했다. 분명히 군대가 나를 바꾸고 있었고 나는 성장하고 있었다.

 전역을 앞둔 2010년 초, 전역 시기와 겹치기는 했지만 오지탐사대에 다시 지원했다. 군인이었던 나는 합격 여부를 떠나 과연 모든 시험을 제대로 치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그것은 하늘에 맡기기로 하고 1차 서류 합격 소식을 받자마자 중대장님께 보고드렸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좋아하셨고 전역 후 원정대에 꼭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격려했다. 다음날 대대장님도 나의 도전에 대해 근엄하면서도 인자한 미소로 말씀하셨다.

 “해병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합격해라!”

 대대장님은 합격 못하면 부대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라며 에너지 넘치는 응원을 해 주셨다. 다행히 2차 테스트에 합격했고, 최종 평가 때는 2년 전과 다르게 적극적이고 용기 있게 임했다. 분명 2년 전의 그 아이와는 전혀 다른 내가 돼 있었다.

 “저 최종 합격했습니다! 통신담당관님.” 담당부서 상사였던 중사님께 가장 먼저 알렸고, 중대장님은 마치 자신이 합격한 것처럼 기뻐했다. 전역하는 날만 기다릴 수 없었다. 혼자서 밤마다 체력 보충 훈련을 했다.

 소극적인 나를 자신감 있는 나로, 두려움을 피하던 것을 두려움과 함께 나갈 수 있는 용기를 군대는 가르쳐 줬다. 군이라는 특수한 환경과 남자답고 리더십이 탁월한 지휘관 밑에서 생활했기에 자연스럽게 나 또한 따라갈 수 있었다. 전역 당일 집에서 하룻밤만 자고 다시 짐을 꾸렸다. 그리고 4일 후 파키스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 인생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기다렸던 세상인데 정말 어디까지 가는지 해 보자!”

 
 정상을 향한 힘겨운 도전

 히말라야에 도착해 산행을 할 수 있는 고도 3045m 지역으로 가는 데만 해도 2박 3일이 걸렸다. 다음날 역사적인 히말라야 ‘곤도고르’로의 대장정이 시작되는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는 캠핑을 시작했다.

 등정의 아침이 밝았다.

11일 일정으로 우리는 5800m 곤도고르로의 대장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힘차게 한걸음씩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3000m 고지대를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뛰거나 몸을 혹사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고산병에 걸리면 나뿐만 아니라 모든 팀원과 일정에 차질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팀이라는 것은 개인을 각각 더해 놓은 것보다 훨씬 더 크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라는 집단 사회에서 우리들이 그렇게 부딪치고 깨지기를 반복하면서 어른이 되듯이, 이곳 원정대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그때 긴급 상황이 발생했다. 출발한 지 3시간만에 포터 한 명이 10여m 절벽 아래로 추락한 것이다. 다행히 강물에 휩쓸리지 않아 로프를 이용해 구조했다. 그러나 장기가 보일 정도로 복부 쪽 상처가 심했고, 다리 한쪽은 반 정도 돌아가고 한쪽 눈은 돌출돼 있었다. 그러나 가장 심각했던 것은 온 몸에서 흘러 나오는 출혈이었다. 숨 쉬는 것에 대한 감사도 잠시, 그는 구조된 지 30분도 채 안 돼 숨을 거뒀다. 그것으로 등반이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 밤 포터와 가이드·대장님은 상의 끝에 먼저 간 그 친구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정상을 밟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루하루 고도가 점점 높아지고 체력은 급격히 떨어져갔다. 원정대 60여 명의 10일치 식량 전부를 가방에 메고 가기 때문에 먹는 것이 부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물은 히말라야 빙하를 녹여 사용했기 때문에 어느 날부터 대원들은 복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 설사와 몸살로 누워버리고 말았다.


설사·몸살… 그러나 포기는 없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산병이었고, 갖고 온 모든 옷을 겹쳐 입고 잠을 잤음에도 불구하고 얼음 바닥 위에 내동댕이쳐진 듯한 한기를 느끼면서 밤새 끙끙 앓았다. 정말 얼어 죽을 것 같았다. 한기를 느끼는 내내 과연 내일 무사히 눈을 뜰 수 있을지,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다행이도 다음날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산행을 시작했지만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죽을 수는 없지만 포기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3일 정도 지나자 몸이 점점 회복돼 설사도 두통도 사라졌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딱 한 가지였다. 만약 내가 포기했더라면 어찌 됐을까. 나 혼자가 아니라 팀이 있었기 때문에, 또 해내야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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