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진정한한국의벗 밴플리트장군

이젠 우리 모두가 그를 마음속에 담아 영원히 기려야

입력 2013. 11. 1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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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끝> 밴 플리트에게서 링컨을 보다!


동족상잔 전쟁 치러 흑인에게 자유 준 링컨과 닮아

전쟁영웅으로 100세까지 장수 ‘영원한 군인’ 명성  

 


※아내 헬렌과 사별

 1983년 12월 말, 밴 플리트는 68년간 결혼생활을 함께한 아내 헬렌, 그리고 딸들 가족과 함께 2주일간 카리브 해로 크리스마스 크루즈 여행을 떠났다. 이듬해 1월 5일 헬렌은 여행 중에 영원히 밴 플리트의 곁을 떠났다. 사인(死因)은 심장마비였다. 10개월 후, 92세의 밴 플리트는 65세의 버지니아 웰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밴 플리트 장군과 같이 근무했고, 주미한국대사관에서도 근무했던 여성이다. 그러나 결혼생활 1년 반도 채 못 되어 웰스와 또 사별하는 슬픔을 겪었다.

 밴 플리트는 92세인 1984년부터 지팡이에 의지했고, 곧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에는 꼭 참석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여행을 만류하는 주치의의 명령에 따랐다. 나이는 그의 몸을 병들고 허약하게 만들었지만, 정신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그는 죽는 날까지 편지를 받아쓰게 하고, 책상에 앉아 자서전을 준비했던 ‘진짜사나이’이자 영원한 군인이었다.



 ※밴 플리트의 유산

 밴 플리트는 1985년 8월, 미 버지니아 군사연구소의 마셜 연구도서관에 자신이 갖고 있던 서신을 포함한 각종 서류와 사진들을 기증했으며, 문서를 분류하고 정리할 수 있는 충분한 돈도 기부했다. 이를 계기로 마셜 박물관에서는 밴 플리트 장군의 생애와 업적에 관한 특별 전시회가 개최됐다. 또한 밴 플리트의 자료는 정리가 완료돼 1994년 6월 일반에게 공개됐다.

 한편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 근무 중, 그리고 후에 우리 정부의 관리·학자 등으로부터 미술품을 선물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 미술품들을 1988년 플로리다 대학의 사무엘 한 미술관(Samuel Harn Museum of Art)에 기증했다. 기증품은 청자·백자 등 도자기와 김홍도·신윤복·장승업·김은호 등의 한국화 등 23점이다.

 한편 뉴욕 소재 Korea Society는 1992년부터 밴 플리트 장군을 기려, 한미우호증진에 기여한 인물에게 ‘밴 플리트상’을 수여하고 있다. 수상자는 구평회(1997), 최종현(1998), 윌리엄 페리(1999), 지미 카터(2000), 반기문(2004), 조지 부시(2005), 이건희(2006), 김대중(2007), 정몽구(2009), 헨리 키신저(2009), 백선엽(2010) 등 이름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인물들이다.



 ※밴 플리트의 실종된 아들 지미를 만나다!

 1992년 3월 19일, 미국 플로리다 주의 폴크 시티(Polk City)의 ‘자유공원’에서 밴 플리트 장군의 100세 생일축하행사가 열렸다. 인구 1500명의 조그만 마을에 버바(Edwin Burba, Jr. 1936~ ) 주한미군사령관, 한광덕 주미한국대사관 국방무관 등 1000여 명의 축하객이 참석했다고 하니, 폴크 시티로서는 역사적인 잔치였고, 밴 플리트로서는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성대한 생일잔치 6개월 후인 9월 23일 수요일 아침, 밴 플리트는 영면했다. 미국언론은 그를 ‘전쟁영웅’이 사라졌다며 애도했고, 우리 언론도 9월 25일 그의 별세소식을 보도했다. 그러나 단신(短信) 뉴스였던 사실에서 보듯이 6·25전쟁 40여 년 만에 그는 일반인들에게 거의 잊힌 인물이었다.

 한편 밴 플리트가 타계한 15년 후 필자는 뜻밖에도 미국 워싱턴DC 근교의 벼룩시장에서 누군가 버리려고 2번 접었던 흔적이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십(十)자 주름이 역력한 사진 속의 인물은 밴 플리트의 실종된 아들 지미와 그 부인이었다. 1948년 사관학교 졸업식 날 결혼한 신혼부부가 다정한 포즈로 찍은 사진이었다. 밴 플리트와 그의 아들은 이렇게 잊혀가고 있었다.

 그때 사진 속의 지미는 필자에게 당부했다.

 “한국인들이 나는 잊더라도 내 아버지는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필자는 지미에게 말했다.

 “우리가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를 잊기에는 당신들에게 진 빚이 너무 많습니다. 내게는 당신의 아버지가 링컨으로 보인답니다.”

※밴 플리트를 어떻게 기려야 할 것인가?

 실제로 필자는 밴 플리트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그에게서 링컨의 모습을 보았다. 링컨은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러 흑인에게 자유를 주었고, 그로부터 약 1세기 후 밴 플리트는 한국인들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헌신했으며 외아들마저 잃었다. 따라서 박인환 시인의 밴 플리트 장군을 위한 헌시로 연재물을 시작했듯이, 링컨 전기 집필로 유명한 미국 시인, 칼 샌드버그(Carl Sandburg, 1878~1967)의 연설로 연재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샌드버그는 1952년 2월 12일, 링컨 탄신 150주년을 기념해 미 상하원합동회의에서 불멸의 연설을 했다. 그것은 생일축하라기보다는 오히려 추모연설에 가까웠다. 독자 여러분은 아래에 소개하는 그의 연설에서 우리가 밴 플리트를 어떻게 기려야 할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강철인 동시에 벨벳 같은 인물, 바위같이 단단하지만 안개처럼 부드러운 인물, 머리와 마음속에 폭풍우와 평화라는 모순을 품고 있는 인물-인류의 역사에서 이런 인물이 자주 출현하지 않습니다. 한 인물이 이렇게 극명하게 대조되는 성격을 가졌었다는 기록은 수 세기에 한 번 나타날 뿐입니다. 링컨은 이런 인물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매우 근사한 성격을 가졌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링컨은 어떤 형태로 후세에 기억되기를 원했을까요? 링컨의 절친(切親) 중에 러브조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러브조이가 1864년 사망하자, 그 친구들이 링컨에게 대리석 기념비 만드는 일에 참여해주도록 요청했습니다. 링컨은 국정에 바빠서 대리석 기념비 건립사업에 참여할 수 없다는 서한을 보내면서, 편지의 끝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러브조이가 모든 사람을 위해 일신을 돌보지 않고,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살았다는 사실이 그의 대리석 기념비와 함께 영원히 살아남기 바랍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가 링컨을 위해 만들어줄 가장 확실하고 영속적인 기념비는 사람들이 눈으로 그를 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링컨이 살아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링컨은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먼 미래까지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유가 있는 곳, 거기에는 반드시 그 자유를 위해 싸우고, 노력하고, 쓰러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말입니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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