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팔도藝人과 천하名匠

들녘 수놓은 신명난 한판 민족의 멋과 흥 아우르다

입력 2013. 09. 2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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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영야류 문장수 인간문화재


 조선 14대 선조(재위 1567~1608) 임금 당시 부산 수영만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營)이 주둔하고 있었다. 수사(水使)는 왜구의 잦은 침노와 노략질을 막아내느라고 지친 병사들을 위한 사기진작 방안이 절실했다. 어느 날 수사가 합천 밤마리(현 경남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에 들러 오광대패가 노는 것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마을 주민 모두가 들에 나와 신명나게 한판 어우러지는 들놀음이었다. 수영으로 돌아 온 수사는 수영 주민들과 병사들을 한데 모아 밤마리에서 본 대로 들놀음을 재연했다. 현재 수영이란 지명은 좌수영의 준말로 수영(水營)이 폐영된 뒤에도 오늘날까지 관아 명칭을 줄여서 그대로 부르고 있다. 예부터 들놀음 탈놀이 등은 들에서 논다 해 야유(野遊)라 적었는데 이곳에선 ‘야류’로 쓰고 있어 수영야류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이후 수영야류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주민화합의 대동놀이로 줄기차게 명맥을 이어 왔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 민속놀이 산증인 200~300명 어우러져 장관 이루는 길놀이가 백미 “네 과장 속 인간사 애욕·탐욕 풍자·내세 경지까지 담겨”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여럿이 모이는 한국인의 집회를 강제로 금지시켰다. 특히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에는 각종 민속놀이는 물론 마을 친목회나 학교 동창회마저 감시하고 해산시키기까지 했다. 250년 가까이 전승돼 오던 수영야류가 마지막 공연을 하고 일제에 의해 해체된 건 1935년. 당시 한민족 고유의 전통 민속놀이가 일제의 강압으로 단절 위기를 맞은 건 수영야류뿐만이 아닌 전국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민속예능이란 본질적으로 구전(口傳)에 의해 전승되는 것이다. 이 고장 사람들은 나고 자라면서 수영야류를 절로 익혔고 어른이 돼서는 지역 공동체 구성원으로 들놀음 행사에 누구나 참여해 왔다. 수영 주민들은 1960년대 들어 최한복 조두영 옹의 구술과 시연을 바탕으로 수영야류의 대사·가면·춤사위·가락을 원형대로 복원해 냈다. 두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됐지만 1930년대 수영야류 들놀음에 수양반 역이나 말뚝이 역을 맡아 직접 공연했던 생존자였다.

 문화재청에서는 한국연극사에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수영야류를 1971년 2월 24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했다. 일찍이 수영야류의 음악·노래·춤 속에 촛농처럼 녹아있는 민속예술의 끼를 나라가 인정한 것이다. 수영야류의 백미(白眉)는 후편 탈놀음에 앞서 200~300명이 동원돼 장관을 이루는 전편의 길놀이다. 길군악이 울려 퍼지며 양반 할미 사자 등 온갖 탈을 쓰고 행군하는 이 길놀이가 민족운동으로 번질까를 일제가 두려워했던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08년 전통예술 복원사업의 하나로 수영야류 중 길놀이를 선정해 원형대로 복원해 냈다. 명맥이 끊긴 지 74년 만이었다. 그 위풍당당했던 길놀이 현장을 목격한 산증인이 바로 수영야류 문장수(文章守·88) 명예보유자다. 이곳에서는 그를 “수영동 214번지에서 태어나 88년을 수영에서 살며 42년째 수영야류 들놀음을 하고 있는 ‘수영의 화석(化石)’”이라고 부르고 있다.

 문 보유자를 사단법인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사무실(부산시 수영구 수영동 229-1번지)에서 만나 전통예술과 평생을 함께해 온 절절한 사연을 들었다. 그는 수영야류의 1세대 인간문화재 윤수만(작고·1971년 지정) 보유자에게 예능을 전수받아 2002년 2월 5일 인간문화재(수사자·셋째 양반)로 지정됐다. 그는 “중요무형문화재가 되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운 길’이라서 후배에게 길을 터주고 2년 전부터 명예보유자로 있다”고 했다.

 “16세부터 일제 보국대에 끌려 가 수영비행장 닦는 데 동원된 이후 40 넘도록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뒤늦게 윤 선생을 만나 재능을 인정받은 후 소싯적 보고들은 끼가 되살아나 이날까지 수영 주민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건 잘 몰라도 민속예술과 수영야류에 관한 책은 많이 읽었다”면서 “중국 일본 대만 우크라이나 등의 해외공연 때 현지인과 교포들이 보내 준 갈채가 늘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지금도 들놀음 판에 나서기만 하면 힘이 펄펄 난다고 한다. 수영야류의 네 과장(①양반과장 ②양노과장 ③할미와 영감과장 ④사자춤과장) 속에는 인간사 애욕과 탐욕에 대한 풍자는 물론 내세의 경지까지 담겨있다고 말한다.

 영감: (바람핀 걸 책망하는 할미를 발로 걷어차 죽여 놓고) 죽은 사람 살아나는 경이나 읽어주오. 봉사: 그게 염불가일세. 저 건너 저것이 북망산이냐/ 어서 가고 바삐 가자/ 다시 갔다 못 오는 길을 속히 가면 무엇하리/ 고적무의(孤寂無依)한 이 영혼을 극락세계로 모셔 보자 (후렴) 니난실난뇨 니난실난뇨 나무아미타불이라.

 그는 들놀음에 참여했던 옛 놀이꾼들은 수영지방의 토박이 상민 또는 중인계층으로 가무에 능한 사람들이었다면서 떠돌이(걸립패) 탈놀이가 아닌 토박이 들놀음이었다고 설명한다. 수영마을 서북쪽에 있는 먼물샘(遠井水·수영구 광안3동 1040-9번지)에서 가장행렬과 소리패 장단으로 시작되는 들놀음은 우리 민족의 멋과 흥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이라고 자부한다.

 “지금은 최첨단 신도시로 변했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수영강이 흐르는 들녘에서 농사를 짓고 하구 앞바다에선 고기 잡으며 살던 곳입니다. 옛날부터 외적이 침입하면 결사항전으로 이 고장을 지켜낸 수영 사람들이지요.”

 수영 마을에서는 아름답던 모래톱이 해수욕장으로 바뀌고 후리그물을 잡아당기며 합창하던 어부들 노래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좌수영어방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2호)로 살려 놓았다. 민속학계선 농경사회서 행하던 자생적인 놀이문화를 연극이나 제의(祭儀)로 재탄생시킨 모범적 사례로 손꼽고 있다.

 이 같은 독특한 지역문화 축제는 부산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수영이란 지명을 확실히 각인시키고 지역경제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들놀음 공연장에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주 찾아 경색된 한일관계와는 대조를 이룬다는 수영야류 관계자의 말이다.

 문 명예보유자는 중요무형문화재 중 수영야류 같은 단체종목은 개인종목과 달리 후계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말한다. 현재 태덕수(85·수양반) 조홍복(81·영감) 인간문화재 외에도 전수조교 이수자 전수자가 여럿 있다.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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