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6·25 지원국열전

희생적 전투로 피를 나눈 형제의 나라

김철환

입력 2013. 07. 07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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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터키



 

 우리에게 ‘형제의 나라’로 잘 알려진 터키는 6·25전쟁 당시 5500여 명 규모의 지상군 3개 여단이 1년씩 교대로 임무를 수행했다. 휴전협정이 체결될 당시 한국으로 향하던 제4여단까지 포함하면, 머나먼 이국땅 대한민국을 찾아와 자유와 평화를 위해 총을 들었던 터키군의 연인원은 2만 명을 훌쩍 넘는다. 

 터키와 대한민국이 서로를 ‘형제의 나라’로 일컫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 것으로 알려졌다. 터키 민족의 선조로 추정되는 돌궐과 우리 민족의 조상인 고구려가 우호관계를 맺고 가깝게 지냈다는 설이 그 첫 번째며, 6·25전쟁 당시 연인원으로 미국 다음으로 많은 규모의 병력을 파병해 대한민국을 도왔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두 번째다.

 첫 번째 이유는 구체적인 역사적 연구 결과 이견도 존재하나, 6·25전쟁 참전이라는 근시대의 분명한 사실은 우리나라가 터키를 ‘피를 나눈 형제의 나라’로 부르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1950년 7월 중순 유엔사무총장의 파병요청을 제의받은 터키는 보병과 포병을 주축으로 공병·수송·병기·통신·의무부대를 포함해 독자적인 전투수행이 가능한 제1여단을 창설, 3개 제대로 나눠 한국에 파견했다. 이들이 부산에 도착한 것은 유엔군과 대한민국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듯이 보였던 1950년 10월 17일이었다.

 후방지역 공비토벌작전 등을 벌이던 터키군이 참전 후 본격적인 대규모 전투를 치른 것은 11월 말에 펼쳐진 군우리 전투부터다. 당시 중공군의 기습 개입으로 혼란을 겪던 유엔군과 마찬가지로 터키군도 중공군의 파상공세에 맞서 완강히 저항했지만 전선 전체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혼란스러운 후퇴 과정에서 터키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여단전력이 와해하는 피해와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하지만 37도선에서 재정비를 완료한 터키군은 1951년 1월 말에 치러진 금양장 전투에서 중공군이 굳건한 방어진지를 구축한 151고지를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점령해 명예를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유엔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 귀감이 됐다.

 같은 해 4월의 장승천 전투에서는 압도적인 수의 중공군에 맞서 66명이 전사하고 105명이 실종되는 큰 인명피해를 입으면서도,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히며 공격을 지연시켜 인접 부대들이 안전하게 철수할 시간을 벌었다.

 치열한 고지전이 이어지던 1952년 이후에도 터키군은 모래성 전투와 네바다 전초전 등에서 행정병까지 달려나와 전투에 참여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러한 희생적인 분투로 터키군은 전쟁 기간 중 전사자 721명, 전상자 2493명, 실종 175명, 포로 234명 등 총 3623명에 이르는 인명피해를 입었다.

김철환 기자 < droid00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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