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미동맹60년 함께가는 60년

건군 초석 다졌으나 미국의 지원 6·25 막기엔 역부족

김병륜

입력 2013. 02. 1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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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 60년 함께가는 60년<5>초창기 군사 원조


 

 47년부터 보급된 미제 무기 군 발전에 큰 도움

 원조 적어 장비보강 못해 북한군 남침 못막아

 

  1946년 1월 국방경비대 출범 이후 1948년 대한민국 국군으로 발전하기까지 미국의 군사원조가 차지하는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말 그대로 무(無)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었지만, 우리가 스스로 감당할 만한 재정적 여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국군의 전신에 해당하는 국방경비대가 1946년 처음 창설됐을 때 보유할 수 있었던 무기는 구 일본군이 사용하던 99식 소총이었다. 그나마 스스로 확보한 것이 아니라 미군으로부터 받았다.

 일본군의 항복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한국으로 진주한 미군은 1945년 9월 7일자로 발표된 맥아더사령부 점령지시 2호에 의거해, 한국에 남아 있던 일본군의 무기를 압수하고 파기 조치했다. 이때 미군은 한국의 장래를 대비해 일본군 99식 소총 6만 정과 탄환 50만 발을 예비무기로 남겨뒀는데, 그 무기를 국방경비대가 인수한 것이다.


 


 

 

 1947년 미제 소총 첫 보급

 미제 무기가 처음으로 보급된 것은 1947년 10월 1일 경비사관학교에 M1 소총이 지급되면서부터다. 경비사관학교, 다시 말해 육사 1~4기는 대부분 일제 소총으로 교육을 받았고, M1 소총으로 훈련받은 기수는 육사5기부터였다. 이 때문에 지금도 육사5기 출신 원로 중에는 ‘미제 M1 소총을 처음 지급받았을 때의 기쁨’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당시 5연대장으로 재임했던 백선엽(군영1기) 장군은 “1947년 가을부터 미군 무기를 이용한 교육을 받았다”면서도 “5연대가 M1·카빈·기관총·박격포 등을 실제로 지급받은 것은 1948년 초반 이후”라고 기억한다. 1948년 6월 27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다가오면서 M3 105㎜ 곡사포, M1 57㎜ 대전차포에 대한 교육도 본격화됐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측과 ‘군사 안전에 관한 한미행정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을 계기로 M3 105㎜ 곡사포 52문을 비롯한 중화기가 처음으로 우리 군의 손으로 들어왔다. 이들 무기는 경찰 수준에 머무르던 우리 군의 장비를 정규군대 수준으로 높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국군 전력증강 놓고 논란

 이처럼 미국이 제공한 무기는 국군의 무장에 큰 기여를 했으나, ‘충분한 수준’은 아니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전해 오는 주한 미 군사고문단의 보고서를 보면 1949년 6월 기준으로 한국 육군 7연대의 미제 카빈 소총 인가량은 1194정이지만 실 보유량은 637정에 불과했다. 일본 99식 소총 인가량은 87정이었으나 실 보유량은 230정이었다. M1917A1 30구경 경기관총의 인가량은 24정이었지만, 실 보유량은 9정에 불과했다.

 한국 1공화국 시기의 국방정책을 연구한 연구자인 윤시원 씨는 “미군이 한국에 양도한 장비는 NSC8에 의거해 5만 명의 육군을 장비할 수 있는 소화기와 소수의 중장비였지만, 한국 국방부가 1948년 12월 6일 인가한 육군 병력은 6만5000명이었다”고 설명했다.

 한국 정부가 1949년 8월까지 육군을 10만 명으로 늘리면서 무기 부족은 더욱 심해졌다. 미국은 1만5000명 분의 장비를 추가 원조하기로 했지만, 한국군의 무기 부족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미 군사고문단과 미국 대사관에 무기를 더 요청했지만 협의는 쉽지 않았다. 무초 주한 미 대사는 “한국 정부가 인가 인원을 일방적으로 늘려 무기가 부족하다”는 입장이었고, 이범석 국방부장관은 “중국 공산군 출신이 북한군에 대거 편입된 상황에서 한국 군대를 증강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미국의 전략방침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8월 20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M2 곡사포 12문을 비롯해 정규군 10만 명을 무장할 수 있는 무기 제공을 요청했다. 한국 정부는 또 그 해 11월 20일 미 하원 예산분과위원회의 윌리엄 노렐 의원이 방한했을 때도 M26 전차 189대를 포함한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한국이 요구한 원조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의 요구에 응하지 못했던 이유는 복합적이다. 자유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를 원조해야 했던 미국의 입장에서 여유가 없는 것이 일단 문제였다. 1949년 미 의회를 통과한 상호방위원조법안에 따른 군사원조 액수 중 92%가 유럽에 투입되는 것이었다. 한국에 대한 원조는 이란·필리핀과 한 그룹으로 묶여 있었는데 한국에 대한 원조를 늘릴 경우 이란이나 필리핀에 대한 원조를 줄여야 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한 1950년도분 원조액 1020만 달러는 3개국 중 가장 많았다.

 또 다른 문제는 미국의 전략방침이었다. 미국은 이미 1949년 1월 15일 주한미군의 주력부대를 한국에서 철수시켰고 잔류 부대 철수도 앞두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은 사활적 이익이 걸린 장소가 아니었다. 1949년 3월 미 국가안보회의(NSC)는 ▲한국 포기 ▲한국을 무조건 무력으로 지원 ▲제한된 조건 하에서 지원제공 등 세 가지 방책 중 세 번째 안을 NSC 8/2로 채택했다. 한국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이었다.

 

 무초 미 대사의 분투

 무초 주한 미 대사를 비롯한 주한 미 군사고문단은 한국 정부의 군사원조 확대 요구에 적극 동조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미국 정부의 소극적 군사원조 정책을 그대로 지지한 것도 아니었다. 1949년 말 무초 대사는 “1000만 달러 규모에 불과한 (부족한) 원조로는 미국의 대한국 정책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 군사고문단도 중화기의 증강과 공군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무초 대사와 미 군사고문단은 F-51 전투기 40대, M2 105㎜ 곡사포 27문 등이 한국군의 전투력 강화에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라고 판단했다. 전투기 한 대 없는 한국 공군과 공수부대용 M3 105㎜ 곡사포만 보유한 한국 포병으로는 한국 방어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미 국방부의 실무자들은 한국에 전투기를 줄 경우 대폭 늘어날 군수 비용을 감당할 방법이 없다고 믿었다. 한국에 대한 소극적인 지원 정책만 담고 있는 NSC 8/2 전략문서도 걸림돌이었다. 무초 대사는 1950년 5월 10일 미 공군참모총장 대리를 만나 “NSC 8/2를 수정하지 않더라도 한국에 F-51 전투기 20~40대를 지원해 주는 것은 무방하다”는 입장을 전달했으나, 정책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결국 무초 주한 미 대사와 미 군사고문단의 노력으로 추가로 확보한 군사장비는 소총, 탄약, 2.36인치 로켓탄, 기타 무전기와 레이더 장비에 불과했다. 이 중 일부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이 시작되던 날 한국으로 수송되는 도중이었다.

 전쟁 당일 북한군은 전차와 전투기를 앞세우고 남침했지만, 국군은 이를 막을 전차 한 대, 전투기 한 대조차 없었다. 부족한 군사원조는 북한군에 비해 한국군의 전력을 열세에 놓이게 했고, 그 같은 전력 열세 때문에 한국군은 북한군의 남침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미국의 군사원조는 국군 건군의 초석을 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전쟁을 막을 만큼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한미 관계의 첫 시련이었다.

 

 




김병륜 기자 < lyue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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