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우리고장명人명당

<67>신채호와 한민족 역사의식

입력 2012. 12. 06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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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언론인으로 역사학자 길 선택 1919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 조직 오로지 국가·민족 위한 노심초사로 일관


신채호 영정이 봉안된 사당. 한민족 상고사를 체계적으로 정립한 겨레의 스승이다.
단재 묘 앞의 풍수물형. 격렬한 풍수논쟁의 우여곡절 끝에 옛 집터를 찾아 안장됐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는 한민족 심성이 어질고 유순한 걸 커다란 긍지로 여겼다. 그러나 지나친 관용심으로 어떤 사상이나 이념, 특정 주의(主義)가 도입되면 분별없이 수용하는 개방심을 항상 지적하며 우려하기도 했다. 중국 망명시절 단재는 현지 신문에 기고한 ‘낭객의 신년만필’을 통해 한민족의 문화적 위기를 예견한 바 있다.

 ‘우리 조선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주의를 위해 통곡하려 한다.’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살다 간 단재는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 노심초사로 생애를 일관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으로 역사학자의 길을 선택한 그는 민족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만이 국가를 지탱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1920년 전후 집필한 그의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은 당시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이 형성해 놓은 한민족의 열등 식민사관을 여지없이 혁파한 명저로 전해지고 있다.

10세 때 중국 역사서 ‘자치통감’ 독파

 단재가 민족주의 사관에 집념을 불태우게 된 것은 그의 성장 과정과 주변 인물들의 교유관계에서 비롯된다. 충남 대덕군 정생면 도림리(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신광식(고령 신씨)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305번지에서 성장했다. 대전 생가(기념물 제26호)는 1999년 복원됐고 청원 성장가 자리엔 단재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어릴 적 단재는 유학자였던 조부에게 한학을 배워 10세 때 중국 역사서인 자치통감을 독파하고 사서삼경을 인용한 시작에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다. 그는 거대한 흐름의 중국 역사를 섭렵하며 한민족의 고대사에 애착을 갖기 시작했다. 고종 32년(1895) 일인 검객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일제의 한반도 강점 책략이 노골화되자 단재는 “이럴 때일수록 민족역사 교육이 절실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22세 때 고향의 문동학원 강사로 계몽운동을 펼치며 25세에는 신규식 신백우 등과 산동학원을 설립해 학동들에게 신교육을 했다. “고려 제6대 성종 당시 서희(942~998)가 고려를 침공한 적장 소손녕을 담판으로 물리친 건 서희가 우리 옛 역사를 소상히 알았던 까닭이다”라는 단재의 열강에 각지에서 찾아온 주민들도 크게 감동했다.

예리한 춘추필봉…日 침략정책에 맞서

 광무 9년(1905) 단재는 성균관 박사가 됐으나 그해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낙심한 나머지 관직을 포기했다. 독립협회에 가입해 소장파를 이끌던 중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 기자가 됐으나 신문이 곧 정간되고 말았다. 단재는 양기탁이 주선한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맡으면서 예리한 춘추필봉으로 일제의 한반도 침략정책에 정면으로 맞섰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신문잡지에 쓴 서슬 퍼런 시론과 논문들은 오늘날까지 우리 언론계의 사표가 되고 있다. 더불어 ‘을지문덕전’과 ‘수군 제일위인 이순신전’을 집필해 한민족이 결코 패배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영웅사관을 제시했다. 만주 봉천의 동창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고구려 발해 유적지를 돌아보고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했다.

 단재는 ▲한민족의 상고사 무대를 만주 중심의 학설에서 벗어나 중국 동부지역과 요서지방까지 확대 ▲한사군은 한반도 밖에 있었거나 전혀 실존하지 않았음 ▲조선족과 백제 유민이 중국 산둥반도에 진출했었다는 실증사학의 토대를 구축했다. 유구한 배달겨레를 열등민족으로 전락시키려는 일제 책동에 부화뇌동하던 친일파 식민사학자들에겐 벽력 같은 일격이었다.

 항일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한 단재는 1919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해 단장이 됐다. 그해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됐으나 이승만의 독단적 노선에 반기를 들고 사임했다. 특히 이승만 정한경 등의 한반도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을 반민족적 행위로 규정짓고 그들과 대항했다. 일제는 단재를 체포하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했으나 허사였다.

1936년 옥중에서 57세의 나이로 순국

 어느 날 단재가 망명지 은신처에서 절친한 동지와 식사를 할 때 일화다. 식탁에 오른 생선이 희귀해 배달 소년에게 물으니 “그 고기는 일본에서 가져온 동양어다”라고 답했다. 단재가 벌떡 일어나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뭐, 왜놈 생선이라고? 내가 왜놈의 음식을 먹다니….”

 단재는 얼른 화장실에 가 먹은 것을 토해 버렸다.

 이런 혐일(嫌日) 주의자 단재도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1928년 5월 자금조달차 대만에 간 단재는 정보를 미리 입수해 대기하고 있던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외국위체(外國爲替) 위조사건에 연루됐다는 죄목이었다. 10년 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 수감됐다. 친일파 친구가 돈을 대납해 병보석으로 석방시키려 했지만 단호히 거절하고 1936년 2월 21일 옥중에서 5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2004년 9월 22일 청원군청에 비상이 걸렸다. 충청북도기념물 제90호로 지정(1993)된 단재 묘가 유족에 의해 파헤쳐진 것이다. 유족 측은 당시 묏자리가 풍수적으로 흉지여서 봉분이 자주 붕괴되고 물이 난다는 이유로 30m 떨어진 옛 집터에 가묘를 조성했다. 3년 뒤 가까스로 양측이 합의해 유좌묘향(정동향)의 묘역을 새로 단장했다. 이 당시 단재 묘를 둘러싸고 촉발된 국내 풍수학계의 명당 풍수논쟁은 아직도 생생하다.

 전통적으로 음택(묘) 명당을 택지함에는 혈처 뒤의 산 능선에서 내려오는 용맥에 비중을 두고 양택(집) 명당을 고를 때는 여근곡(女根谷) 형태의 환포지형을 선호한다. 이때 산악지역에선 전·후·좌·우의 사신사에 치중하고 평야지대에서는 물길을 재는 풍수법수를 우선시한다. 단재 묘는 그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과 함께 혈을 비껴 났다는 풍수가들의 판단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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