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소리 깨운 판소리 중흥祖 제자와의 사랑 이룰수 없음에 그 아픔은 스며 音~ 농익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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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의 신재효 고택. 최초의 여류명창 진채선을 배출한 전통 판소리의 산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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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사랑방의 판소리 전수 모형물. 제자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대신 사설 명작을 남겼다. |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우리의 판소리가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세계무형유산 걸작으로 지정되자 한국 국악계는 크게 감격했다. 마침내 세계가 한국의 소리를 인류가 함께 듣고 즐겨야 할 공통 문화예술로 공인한 것이다. 국악 관계자들은 맨 먼저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241-1번지에 있는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1812~1884) 고택(중요민속자료 제39호)을 찾아가 회한의 축배를 들었다. 동리의 인생역정을 되새기며 새로운 한류(韓流)의 세계 진출을 낙관했다.
동리는 우리 전통음악 판소리의 중흥조다. 그가 살던 조선 말기(순조 헌종 철종 고종 재위)는 왕권이 땅에 추락한 데다 부패 권력의 횡포가 극에 달해 민생이 위태로운 때였다. 뜻있는 식자들은 풍자 섞인 한시로 염량세태를 비꼬았고 분노한 백성은 민란을 일으켜 저항했다. 직성이 안 풀린 민초들은 그들만의 놀이나 소리를 통해 욕구불만을 표출했다. 입에 담지 못할 상스러운 욕지거리와 여과되지 않은 음담패설로 양반과 부자를 능멸하고 조롱했다.
사설(이야기)에 몸짓을 섞어가며 광대가 부르는 평민 판소리는 숙종(재위 1674~1720) 무렵부터 성행하기 시작했다. 중부 이남의 호남지역 무인(巫人)들이 주로 불렀는데 무당의 12굿처럼 12마당(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장끼타령 변강쇠타령 무숙이타령 배비장타령 강릉매화타령 숙영낭자전 옹고집타령)으로 구성됐다.
어민 신세타령 소리 듣고 본격 연구
한성부 직장(直長)이던 동리의 아버지 신광흡(평산 신씨)은 경기도 고양 출신인데 선대 인연으로 고창에 가 한약방을 차려 큰 재산을 모았다. 동리는 그곳에서 어머니 경주 김씨와의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죽자 재산은 동리에게 물려졌고 그 재력을 바탕으로 35세 이후 호장(戶長)이 됐다. 고종 13년(1876) 삼남을 휩쓴 가뭄에 이재민을 구제한 공으로 동리는 통정대부(정3품)를 거쳐 가선대부(종2품·현 정부기관 차관보)까지 올랐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혀 사서오경에 능통하고 박학다식했던 동리는 이재(理材)에도 뛰어나 더욱 많은 재산을 불려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어느 날 고창 해변을 홀로 걷다 어부들의 한탄 섞인 신세타령을 듣던 동리가 흠칫 놀랐다. ‘저렇게 훌륭한 성음 가락을 차마 듣기 민망하고 천박한 사설로 불러야만 하는가.’
순간, 동리의 뇌리에 불길 같은 생각이 스쳤다. 반드시 영의정이나 육조판서로 출사하는 것만이 출셋길이 아니란 생각이 굳혀졌다. 철종 1년(1850) 현 고택 자리에 새로 집을 짓고 판소리 가사를 수집하며 중구난방이던 곡조 체계를 바로 세우기 시작했다. 수년 후에는 소질 있는 문하생을 모아 침식을 제공하며 판소리를 가르쳤다. 당시는 한글을 언문이라 하시하고 광대나 무당을 인간 이하로 멸시 천대하던 때다.
판소리 여섯마당 등 사설문학 완성
동리는 그의 해박한 지식으로 판소리 12마당을 6마당(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으로 선별하고 대문체(對文體)와 어구를 실감 나게 고쳐 사설문학을 완성했다. 고사성어와 백성 애환을 적절히 배합해 유식한 양반마저 당황케 하고 좌중을 요절복통하게 개작했다. 오늘날 판소리 명창들이 부르는 전통 대본 대부분은 그 당시 동리가 쓴 것이다. 실로 우리 가사문학사의 태산보다 높은 위업으로 국악계선 그를 ‘한국의 셰익스피어’라 부른다.
동리 문하생 중 진채선(陳彩仙·1847~?)이란 고혹적인 소녀가 있었다.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 검당포에 사는 당골(무당) 딸로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무가(巫歌)를 어깨너머로 익힌 타고 난 소리꾼이었다. 판소리 이론에만 몰두하던 동리도 채선의 소리에 빠져 동료 문하생들의 시샘을 무릅쓰고 그녀를 편애하며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고종 4년(1867) 흥선대원군이 경회루 중건 낙성연에 전국 명창들을 모은다는 전갈이 왔다. 동리는 며칠의 고심 끝에 서울의 큰물에 가 내공을 겨뤄보라고 스무 살의 채선을 상경시켰다. 천민신분 여자는 궁궐 출입이 불가한 당시였다. 남장하고 최고 권력자 대원군 앞에서 내지른 채선의 성조가(成造歌·대궐 완공을 경축하는 소리)는 참석한 팔도명창들을 압도했다. 천하의 풍류가객 대원군이 그녀를 그냥 놔 둘리 만무했다. 당장 첩실로 앉히고 연회가 있을 때마다 채선을 불러내 여흥을 즐겼다.
사설 집필하며 상사병 고통 이겨내
남녀 간 사랑은 연령 신분 인종 국경도 초월하는가. 소식을 전해 들은 동리는 몸져누웠다. 그때야 35세 연하의 제자 채선에게 품은 연정이 사랑인 줄 알았으나 때는 늦었다. 인간 만사 중 가장 큰 고통은 사람을 기다리는 대인난(待人難)이고 죽어서도 못 고치는 병이 상사병이라 했다. 그러나 동리는 늙은 자신을 주책없다고 꾸짖으며 오히려 사설 집필로 사랑의 아픔을 이겨냈다. 이 시기에 완성된 작품들이 우리 민족 문학사에 길이 남는 도리화가 허두가 치산가 십보가 방아타령 등이다.
동리는 쇠락해져 가는 건강을 돌보지 않고 ▲웅장하면서도 호탕한 우조(羽調)의 동편제(東便制) ▲부드러우면서도 구성져 유연 애절한 계면조(界面調)의 서편제(西便制) ▲첫소리는 평편하나 중간 음이 높아 상·하성이 분명한 중고제(中高制) 판소리를 이론적으로 구획 지었다. 지역적으로는 섬진강 동쪽지역(구례 남원 순창 곡성 고창)을 동편제로, 서쪽의 광주 나주 보성 강진 해남지역은 서편제로, 경기·충청지역 소리는 중고제라 명명했다. 이 모두가 채선과 헤어진 기간에 이뤄 낸 업적이다.
스승의 위독 소식을 알게 된 채선이 대원군에게 읍소해 고창의 동리 고택을 찾았다. 동리는 이미 곡기를 끊은 지 며칠째였다.
“선생님, 소생 채선이가 진정 사랑한 건 오직 선생님뿐이옵니다. 부디 저를 용서하시고 편히 가소서.”
동리가 죽어 고창읍 성두리에 묻히자 그녀는 그날로 종적을 감췄다. 그 후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명창 진채선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령산맥 정기를 받은 고창지역은 인촌 김성수, 미당 서정주, 만정 김소희를 배출한 양택 명당들이 많다. 동리 고택은 유좌묘향(정동향) 대문에 병좌임향(서쪽으로 15도 기운 북쪽)의 부엌으로 동사택이다. 여자가 상하거나 재물이 흩어지는 집터임을 동리가 몰랐을까. 땅의 정기는 사적 제145호로 지정된 고창읍성에 머물러 있다.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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