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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사모아 전쟁을 끝낸 태풍

입력 2012. 06. 04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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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자연의 힘, 일촉즉발의 전운 잠재워


태풍을 순수한 우리말로 ‘싹쓸바람’이라고 부른다. 땅 위의 모든 것을 싹 쓸어갈 정도로 강한 바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신화에 나오는 태풍신은 엄청난 힘을 가진 신으로 그려진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태풍을 주관한다고 믿는다. 그리스의 ‘포세이돈’은 삼지창을 들고 태풍을 부른다. 중동신화의 ‘마르둑’은 괴물 등 위에서 태풍과 폭풍을 조종한다. 일본의 ‘스사노오’는 큰 바람과 너울을 가져온다. 마야 신화에서 ‘우라칸(Huracan)’은 태풍신이다.    미국을 강타하는 허리케인(hurricane)은 우라칸의 미국식 이름이다.

1889년 사모아의 미국과 독일의 분할지배 기념
동전.

미국·독일, 통치권 차지 위해 부족 간 전쟁 부추겨 무력시위 양국 함대 태풍 강타…평화협상 이끌어내
회오리바람이나 허리케인의 어원이 된 우라칸.

 
강력한 바람이 태풍(颱風)이라는 단어로 처음 사용된 것은 1906년이다. 일본 중앙기상대가 ‘기상요람(氣象要覽)’에서 처음 사용하면서 우리나라도 이때부터 태풍을 정식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태풍이 조그만 섬나라 사모아의 역사를 바꾼 적이 있다.

 기원전 1000년께 사모아 섬에 정착한 사람들은 폴리네시아인들이었다. 이들은 차츰 최고 지도자가 있는 계층화된 사회와 요새화된 정착촌을 만들면서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이곳에 나타나면서 사모아의 평화는 깨지게 된다.

1722년 네덜란드의 항해가 야코프 로헤벤이 처음 발견했다.

1768년 프랑스의 탐험가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이 섬에 상륙했다. 그는 사모아인들의 카누 다루는 솜씨를 보고 이 제도를 네비게이토 제도라고 명명했다.

런던 선교회 회원 2명이 1830년 사바이에 정착하면서 서구인들이 사모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사모아의 추장은 1838년 영국 선박 콘웨이 호의 베선 선장, 1839년 미국 측량대 대장 찰스 윌크스와 각각 상업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사모아는 개국했다.

1847년 영국, 1853년 미국, 1861년 독일은 각각 사모아에 영사를 임명했다. 유럽 이주민들과 상사 대리점이 1800년대 중반까지 사모아의 아피아 부근에 모여들었다.

 평화롭게 살아오던 사모아의 부족 추장들은 외국인들의 부추김으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유럽과 미국의 장사꾼들과 외교관들은 이들을 이용해 이권을 챙기기 시작했다.

1848년부터 1873년까지 사모아는 격렬한 내전에 휩싸였다. 서구인들이 가져다 준 총과 무기로 서로 죽였다. 절대지배권을 쟁취하기 위한 부족 간의 전쟁으로 많은 사모아 원주민들이 죽어 갔다. 전쟁은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사모아의 내전은 미국의 특수요원 A. B. 스타인버거 대령이 중재한 평화협상(1873)으로 끝났다. 스타인버거 대령은 사모아에 유럽식의 헌법 초안을 만들었고, 3년 동안 사모아의 독재자 노릇을 했다. 스타인버거 대령이 영국에 의해 추방된 후 다시 부족과 정파 간의 내전이 시작됐다.

1879년 영국은 영국이 지배하는 지방자치제를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과 독일이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아피아에 대한 영향력을 쟁취하기 위해 지도자 간의 계속되는 분쟁에 개입한 것이다. 이러는 와중에 사모아의 통치권이 독일에 넘어갔다.

 미국은 노골적으로 사모아에서의 통치권을 독일에 요구했다. 미국은 1840년대에 일어났던 ‘명백한 천명(天命)’이라는 주의를 들고 나왔다. 미개발 지역에 미국인이 만든 문화를 나눠 준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미국인에게 주어진 지상명령(至上命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의 통치에 시달리는 사모아인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모아의 정치·군사적 위치를 탐내 개입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미국의 요구를 독일이 거부하자 미국은 태평양함대를 사모아에 급파해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에 맞서 독일도 함대를 파견했다. 1889년 3월 16일, 양국 간의 전운이 짙어질 무렵 강한 바람과 높은 파도가 몰려왔다. 태풍이 접근해 오는 것이었다.

미국과 독일의 함대는 태풍을 피해 사모아의 아피아 항구에 대피했다. 더 큰 자연의 적을 피한 적과의 동거였다. 강력한 태풍은 항구에 대피한 미국과 독일 함대를 강타했다.

양국의 전함 여섯 척이 태풍으로 모두 침몰했고, 배에 타고 있던 선원 150여 명이 익사했다. 나머지 선원들은 사모아인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구출됐다. 이젠 더 이상 싸울 무기도 함대도 없었다. 전쟁 직전까지 갔던 양국은 협상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영국의 중재 하에 독일·미국은 1889년 사모아의 독립과 중립에 합의하는 베를린 조약을 체결했다.

태풍이 일촉즉발의 전쟁을 평화로운 협상으로 바꾼 것이다.


[Tip] 독립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

기원전 1000년께 폴리네시아인들이 사모아 제도에 처음 정착했다.

언어 특성을 분석해 본 결과 이들은 통가에서 온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은 평화롭게 살아가면서 나름대로의 사회와 정치체제를 갖췄다.

그러나 서구인들이 들어오면서 이들의 계략으로 동족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결국 서구열강의 각축장이 돼 버린 것이다.

 식민 국가에서 태풍으로 독립국이 된 사모아는 다시 내전에 휩싸였다. 국왕과 부족 추장 간의 분쟁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에 1899년 재 소집된 강대국 3국은 1889년의 조약을 무효로 하고 사모아 제도를 병합했다. 이때 독일이 경도 171°를 기준으로 서쪽 섬들에 대한 지배권을, 미국이 동쪽 섬들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사모아가 본격적인 식민 국가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사모아인들은 독립을 위해 저항운동을 격렬하게 벌였다. 식민 국가가 된 지 73년이 지난 1962년 1월 1일 사모아는 독립을 이뤘다.

 사모아는 외부의 힘을 빌려 권력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국가는 멸망함을 잘 보여준다. 국가의 힘은 국민들의 자율적인 통합에서 나오는 것이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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