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다.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식민지를 경영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전 세계를 휩쓴 엘니뇨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에서 대규모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이런 와중에 1882년 이집트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은 자연스럽게 이집트가 지배하던 수단까지 물려받았다. 그런데 당시 수단은 이집트에 대항해 봉기 중이었다. 이집트가 수단의 수지맞는 사업인 노예무역을 폐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반군의 지도자는 무함마드 아마드 이븐 압달라(Muhannad Ahmad ibn ‘Abd Allah)였다. 그는 자신들의 봉기를 지하드(성전)라고 규정하고 수단에 진주한 이집트 군대를 격파한 후 독립하겠다고 하면서 수도인 카르툼으로 진격했다.
누비아 사막에 철도건설 후 중요 무장전력 기차로 이동 영국의 절대적인 화력에 수단의 이슬람 반군 ‘추풍낙엽’
영국은 카르툼에 남아 있던 소수의 영국군 장교와 1만3000명의 이집트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해 찰스 고든(Charles Gordon) 소장을 파견했다.
이 사건이 배경이 된 영화가 ‘카르툼 공방전’으로 배질 디어든 감독이 1966년에 만들었다.
찰톤헤스톤이 고든 장군역으로, 로렌스 올리비에가 무함마드 아마드 역으로 나온다.
고든 장군은 청나라 정부군 지휘를 맡아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기도 했던 명장이다.
카르툼에 온 고든 장군은 철수작전에 불복하고 카르툼을 사수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나일과 백나일을 연결하는 수로를 파서 카르툼 성벽 방어를 강화했다. 아울러 가축 떼를 모두 카르툼 성 안으로 몰아 장기전에 대비한 식량 비축도 했다.
그러나 전력의 차이가 너무 컸다. 버티는 데는 한계 있었다. 결국 영국은 고든을 구하기 위해 수단에 7000명의 병력을 파병한다.
그러나 구원 병력이 도착하기 전인 1885년 1월 26일 고든 장군은 전투 중에 적군의 창에 사망한다.
영국의 구원 병력이 카르툼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이틀 전에 카르툼이 함락되고 고든 장군이 죽은 뒤였다. 고든 장군을 구원하기 위한 병력 중에 키치너 장군이 포함돼 있었다.
1885년 여름에는 수단원주민 지도자인 압달라가 이집트를 공격해 들어갔다가 영국군에 격퇴됐다. 카르툼 전투에 자존심이 상했던 영국이었지만 워낙 수적으로 불리했기에 현상유지 정책을 폈다.
그러나 영국 총리에 취임한 샐리스베리(Salisbury)는 만일 이슬람 세력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거나, 또는 1869년에 건설된 수에즈 운하에 대한 영국의 접근을 방해할 것이라고 판단해 수단 침공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한다.
당시 이집트군 사령관이었던 키치너는 수단의 이슬람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보급품과 병력의 손실을 입지 않고 이슬람 반군 근거지인 옴두르만까지 진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옴두르만을 장악하면 나일강과 나일 계곡 전체를 차지할 수 있었다.
키치너는 고든 장군의 실패에서 교훈을 배웠다. 고든 장군은 수단으로 진격하면서 빠른 유속과 폭포 때문에 위험한 나일강 남쪽으로 배를 타고 내려갔었다.
그의 병력은 도착하기도 전에 나일강에서 핵심 보급품과 병력을 잃었다. 고든 장군과 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 시기는 나일강의 수량이 불어나 위험했다. 유일한 방법은 누비아 사막을 직선으로 가로질러 진격하는 것이었다. 40만㎢의 건조한 사암 고원지대인 누비아 사막은 황량한 사막이었다.
6월 평균 기온이 43도가 넘고 한낮의 모래 온도는 70도가 넘었으며 밤에는 10도까지 떨어져 일교차가 무려 30도 이상이나 되는 지역이었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고, 오아시스도 전혀 없는 죽음의 사막이었다. 병사들이 행군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이었다.
키치너 장군은 발상의 전환을 한다. 그에게 도움이 됐던 것은 그가 측량을 담당했던 공병장교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철도를 건설하기로 했다.
이집트 군대와 죄수들을 강제로 동원해 1897년 1월 1부터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수단의 이슬람 반군들의 공격도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방어하면서 마침내 1898년 7월 14일, 수단 군사 철도공사가 성공적으로 설치됐다.
예전에는 카이로에서 보급품이 오려면 최소한 넉 달이 걸렸지만 이제는 11일 만에 도착하게 됐다. 무기와 탄약, 보급품, 병력 충원이 신속하게 이뤄짐을 의미했다.
키치너는 영국 정규군 8200명과 이집트인, 그리고 수단인으로 이뤄진 1만7000명의 병력으로 부대를 조직했다.
기차로 아트바라까지 이동한 후 위험도가 낮은 나일강의 중류를 이용해 중요 무장 전력을 진격시켰다.
이를 위해 키치너는 조립식 무장 중기선을 철도로 아트바라까지 운반한 다음 그곳에서 조립했다. 이 무장 중기선에는 포 36문과 맥심기관총 24정을 비롯해 놀라운 화력을 갖췄다.
이 함대가 나일강을 따라 가는 동안, 키치너가 이끄는 군대는 도보 또는 낙타를 타고 옴두르만을 향해 진군해 9월 초 옴두르만의 북쪽인 나일강 서쪽 제방까지 진출했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수단의 이슬람 반군은 영국의 절대적인 화력, 특히 맥심기관총에 무력하게 쓰러져 갔다.
수단의 이슬람 반군은 이 전투에서 1만 명이 전사하고, 1만6000명이 부상당했으며, 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 영국군 측은 겨우 48명이 전사하고 382명이 부상당했을 뿐이었다.
영국군은 마침내 옴두르만을 차지하고 나일 계곡을 완벽하게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Tip]전략가이면서 선전가였던 키치너-독창적 군사전략·모병아이콘으로도 최고
키치너의 승리에는 고정적인 사고에 얽매이지 않는 발상의 전환이 있었다.그가 만일 고든 장군처럼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갔거나, 전통적으로 험악한 사막을 도보로 가로지르는 방법을 사용했다면 그도 실패했을 것이다.
그는 가장 나쁜 날씨조건인 사막과 물이 불어난 나일강을 적절하게 이용했다.누가 사막에 철도를 놓아 군대를 진격하려고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까지도 키치너의 수단 군사 철도 건설은 공학의 놀라운 성취일 뿐만 아니라 통찰력과 대담성 측면에서도 독창적인 군사전략으로 꼽힌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했지만 모병아이콘으로도 최고였다.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부장군으로 임명된 키치너는 대규모 군대를 모병하는 캠페인에 직접 나섰다.
‘당신을 원한다(WANTS YOU)’는 명령에 가까운 구호로 젊은이들의 전쟁 동참을 호소했다.양쪽 끝이 둥글게 말린 긴 콧수염을 기른 키치너의 강렬한 눈빛과 정면을 향한 손가락은 인상적이었다.
포스터에 마음이 뜨거워진 영국의 젊은이들이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2년 동안 무려 200만 명 이상 군에 자원입대했다.적대국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까지도 키치너의 표정과 손가락 모양으로 포스터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