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임진왜란의병영웅열전

<6>비운의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입력 2012. 04. 23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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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때 모든 의병부대 지휘…그 명성 조야<朝野>에 떨쳐


김덕령(1567~1596)은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한미(寒微)했지만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해 용모가 단아했고 체구는 작았지만 용력이 뛰어난 소년으로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국조인물고’에는 그에 대해 “두어 길 되는 칼을 즐겨 써서 술 기운이 있을 때면 말에 올라 산비탈을 달려 지나가면서 칼을 좌우로 휘둘러서 자르고 달리니, 지나는 곳마다 큰 소나무가 어지럽게 쓰러져 마치 폭풍우가 지나간 듯했다. …(중략)… 일찍이 맹호(猛虎)가 대밭 속에 있으면서 나오지 않자 장군이 먼저 활을 쏘아 화를 돋우니 호랑이가 놀라고 성이 나서 입을 딱 벌리고 사람을 삼킬 듯이 하므로, 장군이 창을 빼어들고 맞아 찌르니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데 이러한 일들은 매우 많았다. 매양 스스로를 조운(趙雲), 조자룡(趙子龍)에게 견주었는데 일찍이 시를 지어 ‘군병을 거느리고 적을 무찌르고는 갑옷을 벗고 강호(江湖)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읊었으니, 그 의중을 짐작할 수 있겠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적진 기습 공격 조선인 포로 50여 명 구출 전과 1595년 의령 정진전투서 통쾌한 전승 거두기도

전남 광주시 무등산 충장사에 위치한 김덕령 묘소.
김덕령 초상화(전쟁기념관 소장).

김덕령은 20세에 형 김덕홍(金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를 받았고, 1594년에 의병을 정비해 선전관에 임명된 후 권율(權慄)의 휘하에 들어가 일본군의 호남 지방 진출을 막기 위해 진해·고성 지방을 방어했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해 한때 체포됐으나 왕명으로 석방됐다. 다시 의병장으로 복귀해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을 토벌하려 했지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피체돼 국문을 받았으나 혐의 사실을 부인, 대신들 간에도 찬반 양론이 분분한 가운데 옥사(獄死)했다.

 1661년(현종 2)에 누명을 벗게 돼 관작이 복구됐다. 그 후 1668년 병조참의, 1681년(숙종 7) 병조판서, 1788년(정조 12)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은 그해 6월 형 김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수백의 군사를 이끌고 전주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노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형의 간곡한 당부에 따라 귀가하게 됐다. 그 후 형은 7월에 있은 제1차 금산성전투에서 고경명과 함께 순국했고 다음해 8월에는 노모마저 세상을 떠났다. 형과 모친을 잇따라 잃은 김덕령은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에 나설 것을 결심했다.

광해군, 익호장군 칭호 하사

 1593년 담양에서 거병한 김덕령은 전답과 가택을 팔아서 무기를 마련하고,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군사를 모집하니 장정 5000여 명이 모였다. 이에 분조(分朝)를 이끌던 광해군은 그를 불러 용맹을 시험해 본 다음, 익호장군이라는 칭호를 내렸던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뿐만 아니라 1594년(선조 27) 정월에는 선조도 홍문관 교리 권협을 보내 ‘충용장(忠勇將)’이란 군호와 함께 김덕령의 기병을 격려하는 교서를 내리는가 하면, 비변사에서는 ‘교사충용군(敎賜忠勇軍)’이라 쓴 군기를 제작해 김덕령군의 위용을 보이게 하자는 논의까지 있었다. 그만큼 그에게 건 기대와 신망이 컸다.

 1594년 1월 마침내 김덕령의 의병활동이 시작됐다. 담양을 출발한 의병이 순창·남원을 거쳐 영남 지방으로 향하기에 앞서 격문을 내려 담양·순창·김해·동래·부산을 지나 동해바다를 건너서 대마도와 대판(大阪)까지 진군할 것이라 했다고 한다. 이후 남원에 머물고 있을 때는 뛰어난 장수 최담령(최聃齡)을 부장으로 삼는 등 군용을 더욱 충실히 정비한 뒤 2월에 영남으로 진출하며 군세를 크게 떨쳤다.

당시 김덕령의 위세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그의 위명(威名)을 듣고 남몰래 화공을 보내 김덕령의 형상을 그려 오라고 해 그 그림을 보면서 이르기를 “참으로 장군감이다” 하고 경계했다는 일화에서 가늠해 볼 수 있다.

 이후 김덕령은 권율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해 진해·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했다. 또 의령의 곽재우(郭再祐)에게도 글을 보내 외적 토벌에 상호 협력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이후 충용장 김덕령은 조정에 글을 올려 강화회담으로 별다른 전투상황도 없고, 의병을 유지하기 위한 군량이 많이 부족하니 일부 정예병만을 남기고 해산·귀농(歸農) 조치했다가 적세의 상황을 고려해 군사를 모아 결전할 것을 건의했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놓인 데다가 군량도 부족한 실정에서 의병장으로서는 매우 설득력 있는 군사전략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의 현실적인 방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해 4월에 전국의 의병부대를 해체해 김덕령 휘하의 충용군(忠勇軍)에 통합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로써 27세의 청년 의병장 김덕령은 모든 의병부대를 지휘하며 그 명성을 조야(朝野)에 떨치게 됐다. 또 적진을 기습 공격해 조선인 포로 50여 명을 구출해 내는 전과를 올렸다.

 이 무렵 일본군은 남쪽에 왜성을 쌓고 웅거하면서 좀처럼 응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원균·김덕령·곽재우 등의 장수들에게 수륙연합작전을 명했다. 이에 2차에 걸친 거제의 장문포작전(長門浦作戰)이 시도됐으나 적의 교전 회피로 인해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는 이후 김덕령의 명성을 시기하던 무리에 의해 무능함과 무고의 구실이 됐다. 그 후 1595년에 접어들어 의령의 정진전투에서는 곽재우군과 합동작전을 펴서 통쾌한 전승을 기록한 일이 있다. 적이 야음을 타 기습전을 펴 올 것을 사전에 예측한 다음, 요소요소에 군사를 매복시켜 뒀다가 적이 상륙하자마자 일시에 급습을 가해 거둔 전승이었다.

이봉학 반란 연루설로 옥사

 그러나 김덕령이 기병한 후 3년이 지난 뒤에도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지 못함에 따라 그의 명성에 걸맞은 특별한 전공 또한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누차 조정에 건의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지만 화의(和議)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를 들어 이를 불허함으로써 그의 전투 의욕을 꺾어 버리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1596년 1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김덕령에 대한 무고사건이 일어났고, 특히 이몽학의 반란에 연루됐다는 누명을 써 20여 일간 6차에 걸친 형문과 수백 회에 달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 죽음에 이르렀다.

 임란 의병장 김덕령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그의 의병활동에 있어서 전공이 컸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포승을 끊으며 용호(龍虎)를 쫓고 공중을 나니 지혜는 공명(孔明)과 같고 용맹은 관우보다 앞선다”라고 평가되며 남아의 기개를 마음껏 닦아 전란에서 국가를 위해 싸웠던 청년 의병장의 29세의 짧은 삶과 원통한 죽음이 처절하기 때문일 것이다.

<박재광 전쟁기념관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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