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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정문부 ‘북관대첩의 의병장’

기사입력 2012. 04. 19   00:00 최종수정 2013. 01. 05   07:54

敵의 심리를 잘 이용하는 탁월한 지략·전술가

 우리 역사에는 세종·이순신·정조 등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위대한 영웅들 외에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낸 진정한 시대의 영웅들이 존재한다. 정문부(鄭文孚, 1565~1624)는 임진왜란 때 1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해 2만 명이 넘는 정예의 일본군을 함경도에서 완전히 몰아낸 의병장이며, 오랜 전쟁으로 상처받은 백성을 보살핀 어진 목민관이라 하겠다.

함경도 일대에서 맹활약 관직 연연않고 백의종군 전쟁재발 방지 군비강화 백성 구휼에 힘 쓴 목민관
‘북관유적도첩’에 실려 있는 정문부의 창의토왜도. (고려대박물관 소장)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돼 있던 북관대첩비.
정문부 초상화.(전쟁기념관 소장)
경기 의정부시 용현동 소재 정문부 묘소.

1565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문부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해 7세에 이미 시문을 지었고, 11살에는 사서삼경을 통달해 주위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다. 또 여가를 틈타 간간이 활쏘기를 익혀 문무를 겸비한 선비로 성장했다. 24세 되던 해인 1588년 문과에 급제, 이듬해 승정원 주서, 정자,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정5품) 등 내직을 두루 지냈다.

 1591년 자원해 함경도 지역에서 근무를 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함경도의 조선군은 일본군과의 변변한 전투도 없이 자멸했다. 원래 관북지방은 조정에 대한 원성이 크고 관리들의 수탈이 극심했던 지역으로 그런 피해의식이 반란과 연결되면서 함경도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부터 행정·군사체계가 마비됐던 것이다.

의병모아 일본군 몰아내

 전란 와중에 회령지방의 국경인(鞠景仁) 등이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의 주요 행정·군사 지휘관들이 대부분 포로가 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심지어 함경도로 피난했던 임해군·순화군 등의 왕자들도 반란 세력에게 붙들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겨져 포로가 될 정도였다. 이에 정문부는 함경도 경성에서 의병을 조직, 국경인 일당을 참수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관북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애민(愛民)의 목민관(牧民官)으로도 활약했다. 부역을 공평히 하는 한편, 치안질서와 혜민에 힘쓰는 등 어진 목민관의 진면목을 발휘했다.

 임진왜란 이후 정문부는 장례원판결사, 호조참의, 예조참판,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고 1607년 다시 외방의 수령으로 나가 장단부사, 남원부사, 길주목사 등 지방 목민관으로서 직책을 수행했으며 1615년 병조참판에 임명됐으나 당시의 혼란스러운 중앙 정계를 통탄하며 거절했다. 그러나 1624년 이괄(李适)의 난에 무고하게 연루돼 모진 악형으로 고문을 받아 60세의 일기로 숨을 거뒀다. 후에 신원(伸?)되어 좌찬성에 추증됐다. 경성의 창렬사, 부령의 청암사에 배향됐다.

 정문부는 함경북도 병마평사로서 임지에서 신립의 패전과 평양성 함락, 6월 12일 일본군이 철령을 넘었다는 소식을 받게 됐다. 북평사란 함경도의 북병사 예하에서 군사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자리였다. 품계도 높지 않아 겨우 정6품의 하급직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문부는 관직에 연연치 않고 백의종군의 심정으로 의병에 투신했다. 평소 백성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던 정문부의 창의 소식을 듣고 의병들이 모여들어 초기에는 겨우 100여 명에 불과했으나 점차 증가했다.

 1592년 9월 15일, 정문부는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당시 의병 가운데는 최배천·지달원·강문우 등 리더격의 인물들도 있었고 종성부사 정현룡, 경원부사 오응태 등도 합류했으나 모두가 문무를 겸비하고 전술전략이 뛰어나며 충성심이 강한 정문부를 적임자로 지목했던 것이다.

 기대에 부응하듯 정문부는 전투에서 모두 완벽한 지략을 선보였다. 특히 적의 심리를 잘 이용해 전투에 임한 것이 그의 전략적 승리를 불러왔다. 병력이나 무기체계에서 열세에 처한 의병이 일본군과 맞서는 방법은 유격전으로 맞서는 것이라 생각했다. 함경도 지리에 익숙한 이들을 앞세워 정문부는 적의 주요 보급로와 이동경로를 차단하고, 결사대를 만들어 적의 심장부를 치고 빠지는 기습작전을 자주 벌였다. 귀신같이 나타났다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함경도 의병의 활약에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먼저 정문부는 반란세력이 매우 강성한 점을 감안해 국세필을 우선 회유해 9월 16일 경성에 무혈 입성했다. 이어 10월 14일에는 반란의 수괴 국경인( ?~1592)을 참살했다. 성내에 있는 반란 주모자를 제거하자 원래 이 지역의 조선군사들이 대거 합류하는 등 의병들이 급속하게 모여들었다. 이후 정문부의 함경도 의병은 3000명에 달할 정도로 의병 군세가 크게 강화됐다.

북관대첩비 세워 功 기려

 이후 정문부는 경성으로부터 남진해 가토의 관북지방 점령 거점인 길주성 공략에 나섰다. 이후 길주성에서 집요하게 농성전을 전개하는 일본군을 포위한 후, 길주 주변에서 일본군 소탕전을 펼쳤다. 1592년 10월의 장덕산 전투, 12월의 임명촌=쌍성전투, 다음해 1월의 단천전투와 백탑교전투 등 여러 곳에서 연이어 적군을 격파했으며 해안지방들을 제압한 관북 의병은 여세를 몰아 마침내 길주성을 탈환했다. 이렇듯 정문부 의병의 활약과 명군의 참전으로 수세에 몰린 가토는 함경도를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길주지역에서의 전투는 통틀어 북관대첩(北關大捷)이라 하는데, 정문부의 탁월한 지략과 전술에 의해 임진왜란 전사에 길이 남을 만한 대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문부의 활약은 관군과 의병 간의 공 다툼과 질투로 인해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후 조선 숙종 때에 그 공이 인정돼 북관대첩비가 함경도 길주에 세워졌다. 북관대첩비는 200여 년 후인 1905년 러일전쟁 당시 함경도 주둔군 제2사단장 미요시 나리유기(三好成行) 중장에 의해 약탈돼 일본으로 옮겨졌다. 그 이후 100년 동안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어 있다가 반환 노력 끝에 2005년 10월 20일 환국했으며, 2006년 3월 1일 다시 북한으로 이송돼 함경도 길주(현 함경북도 김책시) 원 소재지에 복원됐다.

 정문부는 일본군의 침입과 더불어 반란이 일어나는 등 다른 지역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함경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몰아내고 적 치하에서 완전히 회복했다. 특히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 군비를 강화하고 치안질서를 바로잡았으며, 전쟁으로 상처 입은 백성들을 구휼해 고통을 경감시키는 등 어진 목민관으로서 전쟁으로 파괴된 국가 재건에 큰 힘을 기울였다. 이 점에서 전국 여러 곳에서 궐기했던 의병장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고 하겠다.

 <박재광 전쟁기념관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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