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아름다운영웅김영옥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113>촛불 ⑶

입력 2011. 06. 21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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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주의자' 영옥, 전쟁·반인도 범죄엔 단호


영옥은 전쟁 범죄나 반인도 범죄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미국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이면
에도 영옥이 있었다. 사진은 2차대전 당시 세칭 ‘일본군 위안부’(유엔의 공식용어
는 일본군 성 노예)들이 있는 ‘위안소’ 앞에서 일본군들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

 재미일본인사회를 위한 영옥의 또 다른 대표적 봉사활동은 재미 일본계의 이민사박물관인 일미박물관의 이사로서 이 박물관의 설립과 발전을 도운 것이다. 이 박물관은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가운데 재미일본인사회와 일본 대기업들이 활발히 참여해 약 4500만 달러라는 거금을 모금, 몇 해 전 멋진 별관을 세우기도 했다.

 일본계는 한국계인 영옥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했다. 2차대전에 참전했던 일본계 미군 장병이 약 2만 명이고, 영옥은 이 일본계 부대에서 사실상 유일한 한국계였다. 만일 입장이 바뀌어 한국계 참전자가 2만 명이고 일본계 참전자가 단 한 명일 경우, 아무리 그 일본계가 신화적 영웅이라 해도 과연 전쟁이 끝난 후 수십 년 동안 한국계가 그를 최고지도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본계는 열린 마음으로 타인의 업적과 리더십을 깨끗이 인정하고 명예롭게 대우하는 선명한 미덕을 보였다.

 전쟁 중에도 민간인 여성이나 포로로 잡힌 여군 또는 전쟁고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남다른 애착을 보였던 영옥은 예편 후에도 여성과 아동을 위해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시아태평양계 가정폭력 피해여성과 그 자녀를 위해 가정폭력 피해여성 보호소를 발전시킨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일원에 있는 이 보호소는 가정폭력의 피해로 피폐해진 여성과 그 자녀가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보금자리다. 적지 않은 수의 한인 여성들도 이곳을 통해 새 삶을 일궜다. 영옥은 1980년대 중반을 전후로 약 10년 동안 이곳 이사장을 맡았는데 그가 사회봉사활동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이때였다.

 “어느 인종 집단이나 가정폭력 문제가 있으며, 이것이 근본적으로 아주 심각한 사회문제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어느 인종 집단이 공개적으로 이런 곳을 후원하면 그 집단에 가정폭력 문제가 많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라고 생각해, 기부금을 줄 때도 비밀스럽게 하는 등 사회적 지지를 확산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이번에도 영옥은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남가주에는 미국 주류사회에 세워진 가정폭력 피해여성 보호소가 있긴 했으나 아시아태평양계(이하 아태계) 피해자들에게는 커다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태계 피해자들이 이곳에 수용되면 언어나 음식 때문에 보호소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곧 보호소를 떠나는 실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태계 피해자들을 위한 보호소가 생기자 주류사회 보호소들도 이곳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자기들의 골치 아픈 문제를 덜어 주기 때문이었다.

 이 보호소는 영옥의 리더십 아래 특히 재미필리핀사회의 적극적 협력에 힘입어 남가주 최대의 가정폭력 피해여성 보호소로 발전했다. 1990년대 들어 미국 연방정부 및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가정폭력 피해여성 보호소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고 재정지원을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캘리포니아 주 카운티 정부들은 혼인증명서 발급 수수료를 인상해 그 인상분을 가정폭력 피해여성 보호소를 위해 쓰기 시작했다.

 인종을 초월해 행해진 저소득층을 위한 봉사활동으로는 ‘케이로 홈의 가족과 친구들’, 소수계 빈민 청소년들을 돕는 ‘특별한 봉사를 위한 특별한 그룹’을 위한 활동 같은 것을 꼽을 수 있다.

 영옥의 갖가지 사회봉사활동이 예외 없이 찬란한 열매를 맺고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이유는 뛰어난 지도자로서 그가 가진 강력한 리더십 때문이다. 이에 대해 영옥은 명쾌한 정의를 갖고 있다.

 “리더십이란 비전과 의지의 결합체다.”

 인도주의자로서 영옥은 한없이 따뜻하고 자비로운 인물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소위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한국전쟁 양민학살 같은 전쟁 범죄 또는 반인도 범죄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다.

 1999년 캘리포니아 주 의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요지의 결의안을 통과시킨 이면에도 영옥이 있었다.

 이 결의안은 마이클 혼다 당시 캘리포니아 주 의원(현재 미국 연방하원의원)이 제안해 세칭 ‘혼다 결의안’으로도 불리는 것으로 일본계 3세인 혼다 의원이 결의안을 내놓자 영향력 있는 재미 일본계 지도자들은 혼다 의원에게 결의안을 철회하라며 압력을 가했다. 이들의 계속되는 압력에 결의안 표결을 연기시킬 수밖에 없었던 혼다 의원은 영옥에게 구원 요청을 보냈다.

 영옥은 혼다 의원의 설명을 들은 즉시 2차대전에 참전했던 일본계 미군 장병 지도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무엇 때문에 전쟁터에서 같이 피를 흘렸는지 되새기며 ‘혼다 결의안’ 지지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이들 다수의 지지를 확인한 영옥은 스스로 ‘혼다 결의안’ 지지서 초안을 작성하고 글 솜씨가 뛰어난 변호사에게 의뢰해 초안을 다듬게 한 후, 자신이 먼저 서명하고 2차대전 참전 일본계 미군 장병 지도자들의 연기명 서명을 받아 혼다 의원에게 보냈다.

 혼다 의원은 자기에게 결의안 철회를 종용하기 위해 재미일본인사회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 갈 때 이 지지서를 품에 넣고 갔다가 회의가 시작되자 서한을 꺼냈고 이를 본 일본계 지도자들은 그 자리에서 반대를 접었다. 앞서 밝혔듯, 일본계 미군 장병 2차대전 참전용사회는 재미일본인사회의 자부심이고 정신적 지주다.

 이렇게 해서 ‘혼다 결의안’은 본회의에서 상정됐고 만장일치로 상·하원을 통과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자행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며 미국 정계를 통과한 최초의 결의안이었다. 이 결의안은 이로부터 8년 후인 2007년 미국 연방하원이 같은 요지를 가진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초석이 됐고, 이 미국 연방하원 결의안은 국제무대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영옥이 혼다 결의안 통과에 결정적 막후 역할을 했던 1999년 AP통신은 6·25전쟁 초기 노근리에서 미군이 한국인 피란민을 대량 학살했다는 요지의 기사를 터뜨려 세계를 흔들었다.

 그 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미국 국방부가 노근리 사건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이때 미국 국방부는 실무적 진상조사단을 보완 또는 감독한다고 볼 수 있는 고위급 진상조사단도 구성하면서 영옥을 이 고위급 진상조사단에 포함시켰다. 신망 높은 한국계가 포함돼야 미국 정부의 진상조사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이유였다. 이 고위급 진상조사단은 명칭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우려에 따라 ‘외부전문가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바꾸고 영옥은 외부전문 위원이 됐다.

 이후 영옥은 실무적 진상조사단의 보고를 챙기며 조사에 대해 협의하고 다른 외부전문 위원들과 함께 사건 현장을 답사하기도 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한미 양국 조사단은 2001년 공동 발표를 통해 노근리 사건의 실체를 인정했으며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공식 성명을 발표, 유감을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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