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병영의추억

<47> 안과원장 유 승 열

입력 2011. 04. 15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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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마음은 멀리 똑똑히 볼 수 있는 눈”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는 이처럼 엄숙하며 고귀하다. 이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남자 의사들은 사회에서 첫 환자를 만나기 전 국방의 의무를 통해 군대 환자를 먼저 만나 다년간 예비 사회생활을 경험한다. 그래서 예비역 의사들은 첫 진료를 시작하면서 소통의 중요성을 곱씹어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유승열 원장 역시 군대에서 많은 경험을 했다며 군대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내성적인 성격을 바꿨으며 위급상황을 재치 있게 맞받아치는 지혜까지 배웠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병원 곳곳에 걸려 있는 수많은 연예인 방문기를 보면서 그에겐 실력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청하는 안과의사인 그의 진료 스타일이 군 시절에 틀을 갖췄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해병대 군의관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대한 현빈이 어느 날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을 외치며 경례할 것으로 생각하니 은근히 부럽기도 했다.

군 생활 중 지금은 고인이 된 선임하사와 함께(오른쪽이 유승열).
진료 중인 유승열 원장.

유승열 원장은
1962년 9월 서울 출생.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안과 전문의이자 S&B 안과 원장. 현 대한안과학회 정회원이자 네이버 지식 in 건강의학 상담 위촉의. 수많은 연예인의 눈 건강을 책임지는 경청하는 안과의사라 알려져 있다.

 “1989년 1월 말, 19기 군의 후보생으로 입대해 39개월을 정확하게 꽉 채운 1992년 4월 말에 제대했답니다. 군의 후보생은 대구 군의학교에서 1주일 신체검사를 마치고 경북 영천 3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12주 동안 받습니다. 그리곤 다시 군의학교로 와서 2주 동안 병과교육을 받지요. 육·해·공을 아우르는 자대 배치는 그 이후에 이뤄집니다.

이때 무의촌 공중보건의와 현역 군의관으로 나뉘는데, 사실 대부분 후보생들은 좀 더 자유롭게 근무 가능한 공중보건의를 선호하지요. 하지만, 국가의 의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더군요.(하하) 전 해군으로 배정돼 진해에서 1주일간 함상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가 끝나면 자대 배치가 결정되는데 일부는 해병대로 파견됩니다. 그래서 전 결국 해병대 소속이 됐지요.

1년은 포항 해병1사단 포병대대에서, 이후 2년은 강화도 해병2사단 보병대대에서 근무했답니다. 지나온 군의관 발자취를 설명하는 데 5분이나 걸리네요. 그래도 어디 가면 해병대 출신이라며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닙니다. 귀신 잡는 해병대라고 말입니다.(하하)”

 최근 배우 현빈의 입대로 핫이슈가 되고 있는 해병대지만 유 원장에게 해병대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의 장이었다는 점에서 놀라움 그 자체였다고 한다. 나이트클럽 웨이터, 주방장, 원양어선 선원, 택시기사, 일용직 노동자까지 정말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해병대라는 이름 아래 모였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오합지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해병대의 힘은 놀랍기만 했다. 전우애라는 지상 최대의 선물을 안겨줬다는 것이다. 조직 사회에서의 적응을 두려워했던 그였기에 군 생활 초반 혼란이 심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며 선후배가 되는 일련의 과정은 뜨거운 에너지를 발산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고 유 원장은 고백했다.

 “적응이 쉽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그것도 금방 지나갔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포항에서 첫해를 보냈는데 오후 5시 30분에 퇴근해 BOQ에 돌아오면 참 쓸쓸했답니다. 룸메이트 군의관은 해안 파견 근무 중이어서 6개월 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시내로 나가 세상 구경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게 즐겼답니다. 아, 포항 시내는 매달 두 번의 호황을 맞이한다고 합니다. 군인 월급날이 15일이니 한 번, 포항제철 월급날이 25일이어서 그때 또 한 번. 15일에는 녹색 군복이 넘쳐나고 25일에는 포항제철 작업복인 황색 군복이 넘쳐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답니다. 퇴근 후 쓸쓸함을 달래고자 애썼던 것과는 달리 부대 내에서는 군의관의 본분을 다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군의관은 1번 열외’라는 편견을 듣기 싫었던 겁니다.

행군 때도 구급차에 선임하사와 위생병을 태우고 전 도보행군을 고집했답니다. 그래서 야전 군의관이라는 별명이 붙었지요. 1사단에서 2사단으로 전출 가던 날, 연대장님이 그러시더군요. `자네처럼 열심히 근무하는 군의관은 처음이었다네.' 그러면서 격려의 술을 주시는데 지금의 아내와 첫 맞선을 보기로 한 약속시간까지 어길 정도로 마셨답니다. 군대가 첫 만남의 기회를 줬으면서 동시에 빼앗아 갈 뻔했던 아이러니한 기억까지 떠오릅니다. 사실 군 생활 중에 약혼까지 이뤄졌으니 많은 행복을 안겨 준 군대가 고마울 따름이죠.”

 부적응을 두려워했던 그가 빠르게 적응하고 군대 내에서 인정받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스로 마음을 열고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지극히 단순한 명제를 가슴속에 품고 군 생활을 보냈기 때문이다. 많은 예비역이 성공적인 군 생활을 돌아보며 이 명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국방부는 정말 모든 소대에 포스터라도 걸어야 할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긍정의 힘이 이토록 대단하단 말인가?

 “늘 긍정적인 마음을 품으며 생활했기에 무사히 제대할 수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형제 같은 전우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알찬 군 생활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어요. 강화도 근무 중 함께했던 의무 선임하사가 있었는데 정말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제대한 후 2년이 지나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지요. 이분을 빼고서는 군대 추억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됐던 분인데 눈물을 흘리며 한달음에 빈소를 찾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만남은 소중하지만, 이별은 정말 아픔인가 봅니다.”

 유 원장은 내성적인 공부벌레라는 학창 시절을 보냈을지 모른다. 의사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에서 만나는 환자는 공부만으로 풀 수 없는 소통·경험·이해를 갈구한다.

이러한 노하우를 오히려 월급 받으며 깨달아 나갔다는 그는 군대에서 참 많은 것을 얻은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유원장의 말처럼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를 정말 포스터로 제작해서 소대마다 붙여둬야 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조기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iammaxim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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