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국군세계를가다

<15>국군 세계를 향한 도약 (1970년대)-상

입력 2011. 04. 12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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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파멸 `타산지석' 위기를 호기로 자주국방 초석을 놓다


1974년 공군이 도입한 F-5E 전투기 모습.
2009년 11월 25일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의 24번째 회원국이 됐다. 1945년 광복 이후 원조를 받던 나라가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로 전환된 세계 최초의 사례가 된 것이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냉전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6·25전쟁을 거치면서 경제적 어려움과 더불어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잠깐의 남북 화해 무드도 있었지만 북한은 1980년대까지 4개의 땅굴 구축, 미얀마(당시 버마) 아웅산에서의 대통령 암살기도, KAL기 격추 등의 도발을 자행해 왔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은 정치·경제·사회적 역경을 극복하고 오늘날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함으로써, 세계 속의 대한민국으로 발돋움하는 진면목을 보여줬다. 이것은 1970년대에 국군이 자주국방 역량을 비축했고, 1980년대에 이르러 전력 증강에 더욱 박차를 가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 이후 1991년 걸프전 국군의료지원단 및 공군수송단(비마부대)의 파병 이전까지 국군의 세계를 향한 도약 과정(70∼80년대)을 2회에 걸쳐 알아본다.

행진 중인 한미연합사령부 장병들. 연합사는 창설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의 전쟁억제와 안전보장에
 기여해 오고 있다.

1975년 방위성금으로 마련한 팬텀기의 위용.

 우리 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를 앞두고 있던 1972년 12월 최초로 국방목표를 ‘자주국방’으로 설정하고 국방정책과 군사전략 수립의 방향을 명문화했다. 이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부터 1·21 청와대 기습사건과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방위의 1차적 책임은 자국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 미국의 중국 및 소련과의 화해 모색, 주한 미 제7사단의 철수 등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그 필요성이 더욱 요구됐기 때문이다.

 이어 1973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은 ‘을지연습 73’ 시 “자주국방을 위한 독자적인 군사전략을 수립하고 전력증강 계획을 발전시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장비의 현대화와 방위산업 육성으로 1974년 2월 건군 이후 최초로 제1차 전력증강 계획인 이른바 ‘율곡사업(조선시대 임진왜란 전에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율곡 이이(李珥)의 호를 딴 암호명, 1974∼1981)이 추진됐다.

1975년 4월 30일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뤄진 남베트남의 패망은 국방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됐다. 이에 따라 총력안보태세 강화를 위해 방위세법 신설, 350여만 명의 민방위대 조직도 진행됐다.

 특히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0년 설립된 국방과학연구소(ADD)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국방과학 기술은 상당히 뒤져 있어 기본 병기 국산화를 추진하기 위한 방위산업 전담부서로서의 기틀이 이를 통해 마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ADD는 미국의 기술적 지원으로 1972년 수류탄·기관총 등 8개 기본 병기의 시사회를 시작으로 1974년에는 M-16 소총 시제품 생산에 이어 양산체제를 이룩했다. 그리고 1978년 중·장거리 유도탄 발사시험에 성공함으로써 한국 방위산업 발전의 신기원을 달성했다. 이어 전차 및 자주포 양산과 오늘날 국산 초음속 고등훈련기인 T-50까지 생산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됐다.

 베트남 전쟁에서 5만여 명의 파병 병력을 지휘하던 주월한국군사령부는 수많은 연합 및 합동작전을 수행한 후, 1973년 7월 제3야전군사령부(先鋒隊) 창설의 모체가 돼 수도권과 중서부 방어 축선의 전력 핵심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하 부대였던 수도사단은 중부전선으로 복귀와 동시에 1973년 3월 한국군 최초의 수도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돼 전략적 기동부대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또 미군의 유명한 일간지인 성조지에 의해 패튼의 제1기갑사단, 로멜의 아프리카 군단과 더불어 세계 10대 강군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제9사단은 서부 전선의 수도 서울 방어의 핵심부대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또한 청룡부대는 해병제2사단으로 개편돼 서해 5도와 강화도 및 김포반도의 전략적 요충지에서 무적 해병의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참전 장병들의 전투 경험은 실전적인 교육 훈련과 교리 발전을 가져왔고, 휴전선을 연한 적의 대침투작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한편 항공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육군은 항공병과가 창설됐고, 해군에도 항공대가 편성됐다. 수도권의 대공방어 능력 보강을 위해 제501방공포병대대가 창설됐다. 그리고 해군의 제1·2·5해역사령부 창설, 공군의 C-130 수송기 도입, 특수전사령부 예하의 5개 특전여단으로 증강 등이 이뤄지며 명실상부한 합동작전 능력을 구비했다.

 미국 대통령 닉슨은 1969년 7월 25일 괌(Guam)에서 그의 새로운 대아시아 정책인 닉슨독트린을 발표했다. 이는 우리에게 ‘자국의 방위는 자국이 책임져야 한다’는 위기감과 함께 한미동맹의 갈등과 균열을 초래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상황을 오히려 자주국방 노력으로 승화하는 호기로 활용했다.

자주국방을 위한 스스로의 노력과 함께 이를 뒷받침할 수 있었던 것은 한미 안보협력에 의한 연합전력 강화였다.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연합작전을 통해 혈맹으로 다져진 군사동맹은 한미 제1군단과 한미연합군사령부 창설 및 팀스피리트 훈련 등으로 이어졌다.

 1971년 창설된 한미 제1군단은 미 제7사단 철수에 따른 서부전선의 방위 공백을 방지했다. 1976년부터는 팀스피리트 훈련이 시작됐다.

최초에는 주한미군의 철수에 대비해 한반도 유사시 미군의 신속한 증원훈련이었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참가 훈련 병력과 장비가 늘어 해병대의 상륙작전까지 포함된 최대 19만여 명의 대규모 연합기동훈련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이 해부터 정부의 전시대비 훈련인 을지훈련과 유엔군사령부 주관의 지휘소 훈련인 포커스렌즈 연습을 통합해 ‘을지포커스렌즈 연습’을 실시했다. 이 연습을 통해 연합 및 합동작전 절차를 숙달하고 유사시 대응 능력을 배양할 수 있었다.

 1978년 11월 7일에는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창설됨으로써 한반도의 전쟁 억제와 안전보장을 위한 확고한 방위체제가 마련됐다.

 닉슨 독트린에 의해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Vietnamization)’는 결국 남베트남군 스스로의 부패와 무능으로 자멸했다.

그러나 전장에서 이를 지켜봤던 한국군은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확고한 대북 억제력을 확보하고, 자주국방을 위한 혼연일체(渾然一體)의 노력으로 ‘한국군의 한국화(Koreanization)’ 초석을 마련한 후 비로소 세계로 웅비하는 1980년대를 맞이했다.

<오홍국 군사편찬연구소 해외파병사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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