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고대동아시아세계대전

<9>이세민 정권 장악 삼국 반응

입력 2011. 03. 09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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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믿을 동맹자 얻어 희망 백제 신라 마음껏 공격 기회 고구려 唐 더욱 강해질까 불안


626년 말께 당나라 황제의 사자 주자사(朱子奢)가 고구려 조정에 도착했다. 그는 삼국이 싸우지 말고 화평하게 지낼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한 황제의 서신을 들고 왔다. 그를 통해 삼국은 이세민의 정권 탈취를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중국의 변화에 대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고구려와 백제ㆍ왜에 포위된 신라 진평왕에게 거물 이세민의 집권은 희망이었다. 수나라가 멸망한 후 고립된 신라가 믿을 수 있는 동맹자를 얻게 된 것이다. 신라는 매년 사신을 보내 당과의 관계를 강화했고, 태종 이세민 개인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고구려 침공 실패의 결과로 생겨난 중국의 처절한 동란 속에서 청춘을 보낸 당 태종은 고구려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2010년 몽골에 혹한으로 인한 대규모 자연재해를 의미하는 조드(dzud)가 발생해 가축 수백만 마리가 동사했다.  조드는
초원의 유목민에게 가장 큰 위협 중 하나다. 600년대 초반 돌궐의 국력은 당나라를 압도했지만, 627년 돌궐에 조드가 발생
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필자 제공

 신라 진평왕은 고구려와 백제의 양면 공격으로 겪는 어려움을 호소했다. 주자사의 삼국 방문과 고구려ㆍ백제에 대해 침공 전쟁 중지를 촉구한 것은 신라 외교의 성과였다. 하지만 신라는 여전히 암울했다. 아무리 당 태종이라고 해도 당시에는 한반도에까지 현실적인 힘을 미칠 수가 없었다.

 627년 당 태종은 재차 백제에 신라 침공 자제를 권유했다. 하지만 백제는 지속적으로 신라를 침공했고, 동시에 사절을 통해 끊임없이 선물을 상납해 당 태종을 무마하려 했다.

 백제 무왕(武王ㆍ600~641)에게 당 태종의 등극은 기회였다. 앞으로 고구려는 당과 동맹을 맺고자 하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백제에 보다 친화적으로 나올 것이다. 당시 고구려와 일종의 연환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해도 중국에 강자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백제가 강국 고구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당의 등장으로 고구려는 중국에도 신경을 써야 하므로 이제 백제는 마음 놓고 신라를 칠 수 있게 됐다.

 신라와 백제는 소백산맥을 넘어서는 두 개의 고개를 두고 치열한 싸움을 했다. 공세적인 무왕은 616년에 남원에서 지리산을 넘어서는 길목에 있는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했고, 신라는 611년에 상실한 가잠성(무주 나제통문 부근)을 7년 만에 탈환했다. 623년 무왕은 신라의 늑노현(괴산)을 공격했고, 624년 10월에 남원에서 지리산을 돌파해 서부경남의 함양ㆍ산청에 위치한 신라의 속함성·앵잠성·기잠성·봉잠성·기현성·용책성 등 6개 성을 차지했다.

 626년 무왕은 당 태종 이세민이 권력을 잡자 사신을 파견해 화려하게 번쩍이는 갑옷(光明鎧)을 바쳤다. 평생 전쟁으로 일생을 보냈지만 무왕은 섬세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 태종이 개선식과 같은 행렬에 정열과 물자를 투자하는 저명한 연출가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 태종은 621년 낙양에서 화북(華北)의 군웅, 두건득ㆍ왕세충을 사로잡아 장안에 개선했을 때 열린 군사 퍼레이드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 눈부신 황금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초원의 돌궐을 완전히 제압하고 서역을 정복할 당시인 637년 무왕은 갑옷과 화려하게 장식된 도끼를 당 태종에게 선물했다.

  능란한 외교를 통해 백제 무왕은 그의 신라 침공을 묵인받았다. 돌궐이 당에 굴복한 이후에도 말이다. 628년 무왕은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했고, 632년에도 신라를 쳤으며, 이듬해 8월에 신라 서곡성을 공격해 13일 만에 함락시켰다. 636년 무왕은 마침내 무주의 덕유산을 돌파해 독산성(경북 성주)을 공격했다.

 고구려 영류왕은 명성이 그 아버지인 당 고조 이연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던 이세민에 대해 은연중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당나라는 이세민의 영웅적 승리들로 인해 세워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아버지 당 고조와 황태자인 형 이건성이 버티고 있었다.

 당을 다녀온 사신을 통해 이세민이 아버지와 형ㆍ동생에게 심한 견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영류왕은 알고 있었고, 혹 그가 암살되거나 아니면 모종의 정변을 일으킬 수 있겠다는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정변이 일어난다면 당 제국은 다시 장기적 분열로 치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626년 6월 4일 단 하루 만에 형과 동생을 죽이고 당 조정을 장악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야전의 달인이었던 군사천재 이세민은 역시 협소한 궁중의 사투(私鬪)에도 능했다. 그러나 정변 직후 군사 천재 이세민이 돌궐의 힐리칸에게 치욕적인 굴욕을 겪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힐리칸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가자 당 태종은 비단과 금은을 바치고 화의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강대한 돌궐이 버티고 있는 이상 당 태종은 만주와 한반도에 현실적으로 힘을 미칠 수 없었다. 당시 동아시아 세계질서에서 돌궐이 차지하는 비중은 중국보다 컸다. 언제나 힘의 축은 몽골고원에 있었다. 유목제국이 분열돼 약해지면 중원 왕조의 힘이 강해졌고, 고구려는 중원의 침략을 받았다.

 수나라와의 전쟁에 청춘을 보낸 영류왕은 이러한 국제 역학 구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돌궐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만큼 누구보다 그들을 잘 알고 있었던 영류왕의 머리에는 근심이 떠나지 않았다. 지금 힐리칸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돌궐의 지배층들이 힐리칸에게 적개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불안한 요소였다. 식자우환이었다.

 돌궐의 왕족은 아사나(阿史那)였다. 그들은 돌궐의 영토와 그 위에 있는 사람과 가축을 씨족 공동의 재산으로 생각했다. 제국의 확대는 씨족 재산의 확대였다. 하지만 힐리칸은 제국의 팽창과 지배에 그의 친척들을 배제하고 소그드인을 대거 등용했다.

‘자치통감’은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힐리는 호족(胡族 : 소그드인)을 신임하고 돌궐(아사나)을 멀리했다. 탐욕스러운 호인들은 군사를 해마다 움직였다.”

 소그드인들은 앞서 내전에서 진창에 빠진 중국에 대한 상습적인 약탈과 착취를 기획했고, 중국에서 뜯어낸 비단과 재물을 동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에 판매하는 유통을 담당했다. 그들은 힐리칸에게 이익이 되는 전쟁을 하게 하는 전쟁기획자들이었고, 동시에 돌궐과 그에 복속된 부족민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들이었다.

 계산에 밝은 그들은 돌궐과 그 피지배 집단이 갖고 있던 온정적인 관습을 무시했고, 흉풍(凶豊)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가혹한 징세를 단행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후 돌궐이 최고의 영토와 전승기를 누리고 있다고 하지만 지속되는 전쟁에 동원돼야 하는 하층민들은 과거보다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우려는 현실이 돼 갔다. 그것은 인재(人災)가 아니라 천재(天災)로 시작됐다. 몽골고원에 언제나 수십 년마다 반복되는 천재(天災)인 조드(dzud)가 찾아왔다. 늦가을 비가 온 뒤 땅이 얼었다. 이듬해인 627년에 몇 자나 되는 큰 눈이 내렸다. 얼음 위에 눈이 쌓여 가축의 먹이인 풀을 덮어버렸다. 영하 40도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추위 속에 가축들은 허기와 떨림, 폐렴 등 호흡기 질병으로 죽어갔다.

 돌궐 전역에 수백만의 가축들이 사라졌다. 가축은 유목민에게 가죽ㆍ고기ㆍ우유와 땔감으로 쓸 수 있는 배설물을 제공했고, 중요한 운반 수단이기도 했다. 좌절과 고통이 유목민들에게 밀어닥쳤다. 모든 초원에는 가축 사체 더미가 널려 있고 부패로 인해 악취가 진동했다. 매장되지 않은 가축 사체 더미는 봄에 날씨가 점점 풀리면서 살아남은 동물과 사람들의 건강을 갉아먹었다. 돌궐인들의 상실감이 썩는 냄새와 함께 광활한 몽골의 초원을 메웠다. 그리고 천재는 내분이란 인재로 이어질 것 같았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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