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다시쓰는6·25전쟁

<45>2월 공세

김병륜

입력 2011. 01. 31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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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더볼트 허 찌르는 `쌍끌이 작전' 적 대혼란 라운드업


1951년 중공군 2월 공세 당시 최대 격전지이었던 지평리 전투 장면을 묘사한 미 육군의 기록화. 자료 사진


1951년 1월 중동부전선의 사정은 다른 곳보다 위태로웠다. 서부전선의 미 1군단과 9군단은 경기도 평택과 안성을 연결하는 선에서 버티고 있었지만 미 10군단이 담당한 중동부전선은 강원도 영월 남방 일대에 돌파구가 형성된 상태였다. 공산군 일부는 충북 단양에까지 밀고 내려왔고, 북한군 10사단 등 일부 부대는 산악지대를 통해 경북 안동ㆍ의성 일대까지 침투한 상태였다. 1월 말에 와서야 유엔군과 국군은 전선 후방으로 침투한 적을 섬멸하고 강원도 영월과 삼척을 연결하는 선으로 북상해 서부전선의 아군과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라운드업 작전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1951년 2월 초 서부전선에서 썬더볼트 작전이 진행되고 있을 때 중동부전선에서는 라운드업(Round Up) 작전이 계획되고 있었다. 미 10군단과 국군 3군단이 참가한 라운드업 작전의 목표는 중공군의 의도와 병력 배치를 파악함과 동시에 중동부 지역의 전선을 홍천 부근까지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모든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미 1군단과 9군단이 맡은 서부전선, 국군 1군단이 맡은 동부전선과 연계해 전체 아군의 전선이 한강 하류-홍천-대관령-강릉까지 북상할 수 있을 터였다. 2월 3일 국군 1군단이 대관령과 강릉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고, 5일에는 미 10군단의 라운드업 작전이 시작됐다.

 같은 날 국군 3군단 소속 5ㆍ8사단이 홍천에 대한 포위 공격을 시작했으며, 2월 7일에는 국군 1군단 소속 수도사단이 강릉을 탈환했다. 썬더볼트 작전 막바지인 9일 미 1군단에 배속된 국군 1사단이 관악산 점령에 성공해 한강선 도달의 발판을 마련했다.

 10일에는 미 1군단과 9군단이 한강 남쪽에 도달했다.  

 이처럼 서부전선의 썬더볼트 작전이 마무리될 무렵 중동부전선의 라운드업 작전은 홍천 주변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교착 국면에 빠져들었다. 아군 공격이 속도를 내지 못한 상황에서 오히려 중공군과 북한군이 홍천 북쪽 일대로 집결하는 징후가 연달아 식별됐다.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은 이처럼 전선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자 미 10군단 소속 부대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 미 2사단에 더이상 북진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당시 미 8군 정보 관계관들은 중공군이 모종의 공세를 다시 감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고, 적 중 일부는 원주-충추로 파고 들어와 아군을 포위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중공군 2월 공세

 휴전 후 밝혀진 공산 측 자료에 따르면 이 같은 미 8군의 정보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당초 중공군과 북한군은 유엔군과 국군이 1951년 1월에 감행한 울프하운드 작전과 1월 하순부터 2월 초까지 감행한 썬더볼트, 라운드업 작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유엔군과 국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후퇴를 멈추고 공격으로 전환하자 공산군 측은 당황했다.

 한반도에 주둔한 중공군의 지휘관이었던 펑더화이는 1월 27일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에게 전보를 보내 “일부 부대의 철수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동시에 국군 일부를 공격해 북진을 멈출 수 있는지 여부를 시험해 보겠다는 의사를 타전했다. 또 “정치적으로 서울 포기가 허용되지 않는다면 반격을 해야하는데 반격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무리하다”는 자신의 판단도 첨부했다.

 다음날인 28일 마오쩌둥은 서울을 확보하도록 요구하면서 주력으로 강원도 원주를 공격해 경북 영주ㆍ안동으로 돌파하는 작전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펑더화이는 역습 작전을 감행해 상황을 타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중공군과 북한군은 양평 남동쪽·원주·횡성지역의 아군 부대를 역습하기로 2월 7일 결정한 상태였다. 미 8군이 라운드업 작전 중 식별한 공산군 측 병력 이동 징후는 이 같은 2월공세 준비를 위한 병력 이동이었던 것이다.

 ■고난의 횡성전투

 2월 7일 펑더화이는 예하 부대 지휘관들에게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와 횡성 중 어느 곳을 먼저 공격할 것인지를 예하 부대 지휘관들에게 질문했다. 두 곳 모두 전선에 구멍을 내어 동서로 아군을 분할하기에 좋은 지점이었으나 병력이 부족해 선후를 판단해야 했던 것. 이 같은 논의 끝에 중공군은 횡성을 먼저 노리기로 결정했다. 지평리의 미군을 먼저 공격해 성공하지 못할 경우 주변에 증원할 수 있는 유엔군 병력이 많아 위험 부담이 크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같은 판단에 따라 2월 11일 중공군은 무려 11개 사단에 달하는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해 그 중 9개 사단을 국군 1개 사단 규모가 방어하는 횡성과 그 이북 일대를 집중 공격했다. 중공군은 이처럼 결정적 지점에 압도적인 병력을 집중하는 방법으로 확실한 승리를 담보하려 했다.

 1대 9의 싸움이었으니 결과는 중공군의 의도대로였다. 횡성 일대에 배치된 국군은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날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 고위 지휘관 중 일부는 국군이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한 것에 불만을 표시했으나 무기와 장비가 중공군과 별 차이 없는 국군이 9배나 많은 중공군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중공군은 미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장비가 빈약한 국군을 철저히 노리고 있었으나 유엔군 지휘부는 이 같은 중공군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평리전투의 서막

 횡성의 국군이 후퇴함에 따라 경기 양평의 지평리에 자리 잡은 미 2사단 23연대의 오른쪽 공간이 열려 버렸다. 양평읍에서 동쪽, 횡성에서 서쪽, 남한강 북쪽에 자리 잡은 지평리는 동서로 놓인 중앙선 철도와 홍천에서 여주로 가는 도로가 교차하는 요충지였다.

 이처럼 횡성 일대의 전선이 붕괴된 이상 지평리의 23연대도 후퇴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2월 12일 23연대장 폴 프리먼 대령은 직속상관인 2사단장에게 철수 허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2사단장은 뜻밖에도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리지웨이는 이미 며칠 전 지평리 일대의 미 2사단에 진격 정지를 명령할 때부터 이 같은 상황을 예상했던 것인지, 횡성이 무너진 위기 상황에서도 지평리의 미군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리지웨이는 지평리의 미군으로 하여금 끝까지 버티게 하면서 화력으로 중공군을 강타할 생각이었다. 마침 지평리 주위는 280미터 내외의 고지가 둘러싸고 있어 사주방어진지를 편성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준비된 전장

 리지웨이는 의도적으로 지평리에서 결전을 준비했으나 중공군은 이 같은 미군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지 못했다. 의도뿐만 아니라 미군의 정확한 전력도 파악하지 못했다. 중공군은 지평리에 있는 미군이 4개 보병대대, 다시 말해 순수하게 보병으로 구성된 증강된 연대 규모로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지평리에는 미 2사단 23연대 외에도 프랑스군 대대, 105㎜ 곡사포대대 1개, 155㎜ 곡사포 중대 1개, 전차 중대 1개, 고사포 중대 1개 등 6000여 명의 병력이 있었다. 장비도 곡사포가 24문, 전차도 21대가 있었다. 편제와 상관없이 실제 장비와 전력을 따져보면 국군 1개 사단급을 훨씬 상회하는 전력이었다. 그럼에도 지평리에 투입된 중공군의 실제 병력 규모는 횡성전투 때보다 오히려 더 적었다. 중공군은 상황을 오판하고 있었던 것.

 더구나 23연대장 폴 프리먼 대령과 프랑스군 대대장이었던 랄프 몽클라르 중령은 모두 노련한 지휘관이었다. 특히 몽클라르 중령은 제1ㆍ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6·25전쟁 발발 당시에는 이미 프랑스군 중장이었다. 프랑스 정부가 1개 대대 병력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그는 지휘계통이 애매해지지 않도록 중령으로 강등되는 것을 감수하면서 참전을 자원한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중공군은 참전 이래 계속 미군을 속이고 유인했으나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미국은 지평리 전투가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라는 점은 알았으나 잘만 한다면 오히려 중공군을 화력으로 격멸할 절호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김병륜 기자 < lyue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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