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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풍운의 별-137-향군 산하 주요직 역임

기사입력 2010. 01. 22   00:00 최종수정 2013. 01. 05   05:15

군부대 안보강연에 나선 필자.                                                                                                         <필자 제공>


김영삼 정부가 끝나갈 무렵, 그러니까 1996년 3월쯤 재향군인회 장태완(張泰玩) 회장의 요청으로 그와 오찬을 했었다.YS정부 출범 이듬해인 1994년 4월에 취임한 그는 벌써 3년 임기를 마치고 얼마 전 향군회장에 재선출돼 의욕적인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향군에 6·25관련 단체 난립

12·12 사태 당시 수경사령관직을 끝으로 옷을 벗은 장 회장은 이런저런 얘기 끝에 용건을 꺼냈다. “재향군인회 산하에 6·25 관련 단체가 난립해 있는데다 서로 싸우는 통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박 장군님께서 이 단체들을 잘 좀 수습해서 하나로 통합해 주셨으면 합니다.”

 실제로 그 당시 향군 산하에는 12개나 되는 6·25 관련 단체가 난립해 있었다. 1996년 3월 중순, 나는 재향군인회 안에 ‘호국정신선양운동추진위원회’(약칭 ‘추진위’)라는 단체를 만들고 그 위원장을 맡았다. 이어 6·25 관련 단체 회원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향군 대강당에서 호국정신 선양운동 추진위원장 취임식을 가졌다.

향군에서는 나에게 과장급 직원 한 사람을 지원해 주었다. 나는 추진위를 운영하면서 20만 회원들의 복지와 권익을 위해 다양한 사업과 활동을 펼쳐 나갔다. 추진위를 운영한 지 1년여 만인 1997년 7월 14일, 나는 10여 개로 난립해 있던 6·25 관련 단체들을 하나로 통합, ‘한국참전단체총연합회’(약칭 ‘참전연·參戰聯’)를 창립했다.

 그때부터 추진위 대신 참전연이 본격 가동되기 시작했다.그러니까 추진위는 참전연을 만들기 위한 준비 조직인 셈이었다. 나는 추진위원장직에서 새로 창립한 참전연 사무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태완 회장의 뜻에 따라 유재흥(劉載興·군영·합참의장 역임) 전 국방부장관을 초대 회장으로 영입했다.

통합되기 전에는 그렇게 시끄럽던 조직이 통합된 이후부터는 차츰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4년이 지난 2001년 5월 16일, 유재흥 회장은 참전연 조직을 법인화하고, 그 명칭도 ‘사단법인 6·25참전전우기념사업회’로 바꾸었다. 그러면서 조직개편도 이뤄졌다. 나는 그때 부회장직을 맡게 됐고 사무총장엔 김학호(學浩) 예비역 육군소장이 임명됐다.

 조직을 법인체로 전환한 지 3년이 다돼 갈 무렵인 2004년 3월, 유재흥 회장은 자신의 임기 만료를 앞 둔 시점에서 후임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기념사업회의 공식 명칭도 ‘사단법인 대한민국 6·25참전 유공자회’로 변경했다. 이런저런 후보자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가운데 채명신(蔡命新·육사5기·2군사령관 역임·중장예편) 전 주월사령관도 강력한 후보로 접수됐다.

1년여만에 12개단체 통합

당시 김학호(學浩) 사무총장은 유재흥 회장에게 여러 명 후보들의 현황을 보고하면서 가장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후보로 채명신 장군을 추천했다. 나도 채명신 장군이라면 누구보다 적임자일 것이라며 그를 적극 추천했다.

 나와 김학호 사무총장을 앞에 두고 유재흥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먼저 채 장군에게 직접 확인해 보고, 본인의 뜻이 확실하면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해 보라. 그것을 수용할 수 있다면 차기 회장으로 영입하자.” 유 회장이 언급한 ‘조건’이란 그때까지 채명신 장군이 맡고 있던 ‘월남전 유공자회’와 손을 떼고 6·25 유공자회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조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박정인 전국방부전사편찬위원장·정리=김준범 언론인 balm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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