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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리트 히긴스의 6·25전쟁 르포 `자유를 위한 희생' <3>

입력 2009. 11. 11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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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첫 후퇴-피란민과 함께 南으로…특종을 잡다


6·25전쟁 중에 만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출처:War In Korea>


 라이트 대령의 전속부관으로부터 적의 공격 소식을 듣자마자, 우리 막사 주변에 박격포가 터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재빨리 지프에 몸을 싣고 어두운 빗길을 뚫고 한강 인도교로 달렸다. 그때 오렌지색 불길 한 줄기가 하늘을 갈랐다. “어이구 큰일이야, 다리가 끊겼네.” 전속부관이 외쳤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것이다. 나를 비롯한 미 군사고문단 일행 59명은 본부로 되돌아왔다.

 라이트 대령이 증오에 찬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한국인들이 우리에게 한 마디 경고도 없이 한강 인도교를 날려버렸다. 자국 군인들을 실은 트럭들이 다리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데 다리를 폭파했다.” 장교들 사이에는 서둘러 빠져나가지 않으면 포로가 될 것이라는 극도의 심리적인 불안감이 팽배했다. 그러나 라이트 대령은 침착하게 위엄을 보이며 사태를 진정시켰다.

 “자, 제군들, 주목하기 바란다. 그 누구도 혼자 도망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이제 공동운명체다. 침착해야 한다. 한강에서 차량들을 갖고 서울을 빠져나갈 수 있는 조립교(組立橋)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프·트럭·무기 수송차량 등 60대의 차량대열을 정비하고, 전조등을 밝힌 채 다시 출발했다. 언제 적지에 뛰어들지도 모르는 위험한 길이었지만, 조립교를 찾아 몇 시간이나 헤맸으나 허사였다.

 정찰대가 나룻배로 강을 건널 장소를 물색하는 동안 라이트 대령이 나의 침울한 심정을 알아차리고 말을 걸었다. “젊은 여기자 양반, 기사 송고를 못할까 봐 두려운 것이지요?” 실제로 나는 도쿄에서 함께 온 세 명의 남자 특파원이 수원에 먼저 도착해서 기사를 송고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내게 제안했다. “보세요. 여기 통신트럭이 있잖아요. 기사를 짧게 쓰면 당신 메시지를 송출해 보도록 할게요.”

 희망의 빛이 보였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타자기를 꺼내 지프 앞에 올려 놓고 미친 듯 자판을 두드려댔다. 정지해 있는 우리 차량대열 옆으로 한국 군인들의 긴 후퇴 행렬이 끊임없이 계속됐다. 한국 군인들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새벽 안개 속에서 짙은 남색 스커트, 꽃무늬 블라우스, 연한 청색 스웨터를 입은 내가 그들에게는 특이한 존재로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기사를 완성해 송고하려 했으나 대령의 말과는 달리 통신트럭에는 전송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기사 전송을 못해 낙담할 겨를도 없이 벌써 적의 포가 우리를 겨냥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나룻배로 어렵사리 강을 건넜다. 그 후 산길을 따라 수원까지 걸어서 이동했다. 우리는 일렬종대로 거대한 피란민 대열에 합류했다. 나는 몸이 원기를 잃어서 일행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남쪽으로 흙탕길을 한 시간쯤 걸었을 때, 하늘에서 윙윙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은빛 전투기들이 다가와서 공중곡예를 시작하더니 서울 상공에서 급강하했다. 나는 흥분돼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것이 맥아더 장군의 메시지에 언급된 ‘중요한 사건’의 하나임에 틀림없었다.

 정말 감미로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즐거움을 맛본 것은 잠시였다. 행진은 긴 환호를 허락하기에는 너무도 냉혹했고 처절했다. 이 지역에서 한국인들이 패배한 것이 분명했다. 많은 한국 군인들은 남쪽으로 향하는 우리 미국인 일행을 보자, 무기를 버리고 방향을 돌려 도망쳤다.

 새로운 임시 수도가 된 수원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다. 이 때문에 무초 주한미국대사는 종군기자들을 모아 놓고 떠나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우리를 귀찮은 존재라고 단정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세 명의 신문사 동료를 만났다. 서울에서 나보다 먼저 출발했던 그들은 한강 인도교를 건너다 다리가 폭파되는 바람에 두 명이 부상당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날 나는 동료들과 기사 송고가 가능한 일본 이타즈케 공군기지로 되돌아갔다. 비행기로 그곳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당시 한강을 건너 서울을 벗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를 알게 됐다. 우리가 한강을 건너던 바로 그 시간쯤 많은 외국인이 적에게 체포됐다고 들었다.

 다음날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수원공항의 활주로에는 맥아더 사령관의 그 유명한 전용기 ‘바탄’이 착륙해 있었다. 맥아더는 지프 편으로 한강을 시찰하러 갔다가 비행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나는 바람이 세찬 활주로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그의 방문에 관한 긴급 기사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그는 금실로 필리핀의 바탄섬 모양을 수놓은 모자를 쓰고, 컬러 부분을 열어 놓은 셔츠 위에 여름용 황갈색 군복을 입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활주로에서 나를 보자,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도쿄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동승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직접 만나보면 맥아더 장군은 인자하고, 대단히 명석한 인물이다. 일부에서는 그가 폼 잡기 좋아하는 인물이라고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는 그러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다. 미국 정부가 맥아더를 한국에 보낸 것은 한국을 구원하는 데 공군력과 해군력 지원만으로 가능한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반도를 포기한다는 기존의 결정을 번복해 이제는 이 반공의 보루를 가능하다면 구원하겠다고 결정한 것이 분명했다.

 비행기 내에서의 단독 인터뷰에서 맥아더는 말했다. “한국인들은 미군 정예부대의 투입을 간절히 필요로 합니다. 한국군 장병들은 신체 조건이 좋습니다. 솔선수범하는 지휘관이 있으면 전의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내게 2개 사단만 주어지면, 한국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2개 사단이면 “한국을 지킬 수 있다”는 맥아더 장군의 신념은 미 군사고문단과 그의 측근 지휘관들의 건의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그들이 아직도 적을 너무 모르기 때문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북한인들이 소련의 지원으로 군비를 확충했으면 얼마나 했겠느냐 하고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비행기에서 나는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특종을 건졌다. 미국의 지상군 파병에 관한 최초의 언질을 그에게서 들은 것이다. “도쿄에 도착하는 순간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에 2개 사단을 파병해주도록 건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나의 건의를 수용할지는 알 수 없군요.”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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