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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박천·태천·용산동 부근 전투(1950. 11. 6∼11. 30.)

기사입력 2009. 11. 09   00:00 최종수정 2013. 01. 05   05:04

국군1사단, 산악으로 숨은 중공군에 큰 타격

북진시 북한지역 주민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는 국군장병들.

중공군의 직접 개입은 6·25전쟁을 새로운 전쟁으로 만들었다. 중국의 모택동(毛澤東)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개념 아래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이라는 이름으로 중공군을 한반도에 투입하면서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고, 국가 건설을 위한 소련의 원조를 확보하려 했다.

 중공군은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도하, 10월 25일부터 작전을 개시해 우선 압록강 초산(楚山)까지 진출한 한국군 6사단의 배후를 차단하면서 한국군 2군단(6·7·8사단)에 섬멸적 타격을 입히고 한국군 1사단도 공격한 다음, 이를 지원하는 미군도 측후방에서 공격함으로써 8군을 후퇴시켜 차후 작전을 위한 기지를 확보하려 했다. 전력이 약한 한국군을 먼저 공격해 전역을 분할하고 전선의 균형을 무너뜨림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을 동시에 후퇴, 섬멸시킨다는 전법(避實擊虛)을 적용한 셈이다.

 중공이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1950. 10. 25∼1953. 7. 27)을 시작함에 따라 한국군과 유엔군은 맥아더의 표현대로 새로운 적과 싸우는 `새로운 전쟁'을 수행하게 됐다. 중공군의 개입 의도(意圖)와 규모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유엔군 사령부는 서부 전선에서 한국군을 집중 공격하고 이를 지원하려던 미 1기병사단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 중공군이 11월 5일 공격을 중단하고 산속으로 모습을 감춰 버리자, 청천강(淸川江) 선에서 차후 공격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청천강 북안(北岸) 박천(博川)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던 미 1군단(Frank W. Milburn 소장) 소속 한국군 1사단(백선엽 준장)도 적극적인 위력 수색작전과 제한적인 공세작전을 수행해 나갔다. 그리하여 1사단은 11월 17일까지 15연대(조재미 대령)가 박천 서남쪽 일대를 장악하고, 12연대(김점곤 대령)는 박천에 연대본부를 설치하고 15연대와 연결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군 1사단은 박천에 사령부를 두고 중공군 주력의 산악 철수를 엄호하던 북한군 17사단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뒀다. 또 중공군이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미 1군단은 운산 지역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은 군단 우측 미 1기병사단을 예비로 전환하고 한국군 1사단을 우익으로 용산동∼대령강 선에서 태천∼구성∼삭주 방향으로 공격시키고, 미 24사단을 좌익으로 대령강 서쪽 해안지역 신의주(新義州)로 진격하도록 계획을 세우고 한국군 1사단으로 하여금 미 1기병사단 지역을 인수하도록 했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미 8군이 청천강에서 전선을 정비하는 동안 압록강 철교를 폭격해 중공군의 증원과 보급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공세 준비를 진행시켰다.

 크리스마스 전까지 미군 병사를 귀가시키겠다(Home by X-mas)는 맥아더 장군의 구상에 따라 이름까지 크리스마스 공세로 명명된 한국군과 유엔군의 공세는 1950년 11월 24일(11월 15일 계획이었으나 미 9군단 북진 지연으로 24일로 결정됨) 시작됐다. 공격 당일 한국군 1사단 11연대(김동무 대령)는 일부 적을 격파하고 태천(泰川) 동북방에 진출하고 12연대도 태천 남쪽까지 진출했으며, 15연대 역시 12연대 좌측방을 방호하면서 진격했다.

 11월 25일, 태천을 목전에 둔 한국군 1사단은 심한 적의 저항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고 진지를 구축하면서 태천 탈환 준비를 서둘렀다. 11월 27일에 이르러서는 12연대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적의 압력이 가중되면서 한국군 1사단을 공격해 왔고, 28일 아에는 사단 전 접촉선에서 근접전투를 반복하면서 북진을 계속하려 했으나 11연대가 적에게 포위당할 위험에 처하게 됐다.

 그리하여 사단은 일단 철수해 용산동(龍山洞)에서 고창리(古倉里)에 이르는 방어선을 설정하고, 대령강(大江) 동쪽에 15·11연대를, 서쪽에 12연대를 배치해 방어진지를 점령토록 조치했다. 이러할 즈음,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을 확인한 맥아더 장군은 서부전선의 미 8군과 동부전선의 미 10군단의 전면적 철수를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한국군 1사단은 1950년 12월 1일 숙천(肅川)을 중심으로 동쪽에 12연대를, 서쪽에 15연대를 배치하고 11연대를 예비로 영유(永柔)에 위치시켜 우측의 미 9군단과 더불어 평양 북방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통일의 꿈이 무산된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을 쓰다듬고 있었다.

 이른바 10월 공세로 불린 1차 전역을 치르고 중공군이 산악으로 자취를 감춘 후부터(11월 6일) 크리스마스 공세를 치른 직후(11월 30일)까지 한국군 1사단은 적극적인 위력 수색과 공격·방어 및 철수 등의 작전을 수행하면서 북한군과 중공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전사 50명, 전상 187명, 실종자 165명의 피해를 감수했지만 한국군 1사단은 적 사살 1353명, 포로 71명을 획득하고 각종 장비와 무기(소총 : 177정, 경기관총 : 11정, 박격포 : 3문, 지뢰 : 150발, 무전기 : 2대)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뒀다.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多富洞) 전투 승리 이후 평양에 제일 먼저 입성한 병사들의 긍지와 “지휘관은 항상 병사들과 더불어 가장 위험한 곳에 위치해야 한다”는 사단장(백선엽 준장)의 신념이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온창일 육군사관학교 전쟁사 전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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