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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마와 조선 건국

기사입력 2009. 07. 07   00:00 최종수정 2013. 01. 05   04:46

장마로 고려의 요동정벌 물거품

“명나라를 공격하기에는 네 가지의 옳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소국(小國)으로서 대국(大國)을 정벌하려는 것이 첫째이고, 여름철에 군사를 발동시키는 것이 둘째이며, 전군이 원정에 참여해 버리면 왜구의 침입 우려가 셋째이고, 여름 장마철이 옴으로써 활 쓰기가 불리하며 질병이 창궐할 수 있음이 그 넷째입니다.”

명나라를 공격하라는 우왕의 지시에 이성계가 명나라 공격불가론으로 내세웠던 네 가지 이유다. 이 중 날씨와 관련된 것이 두 번째와 네 번째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에서 날씨가 매우 중요한 승패 요소였음을 알려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고려 말기는 기후의 변화가 심한 시대였다.

1352년에서 1374년까지 공민왕 재위 23년간 기근은 13회에 이르렀고 태풍·우박·큰 안개가 빈번했으며 큰 비로 대수해가 5회, 한발이 있었던 해는 8회에 달했으니 2년에 한 번 정도 큰 수해와 한해를 받았다. 중국의 경우에도 소빙기에 접어드는 서기 1300년 이후에는 가뭄·홍수·추위와 전염병이 번갈아 찾아오면서 원나라의 국력이 크게 피폐해졌다.

도처에 기근으로 농민들이 땅을 등지며 도적이 됐고 이들은 조직화되면서 국가에 대항했다. 이들 중에 주원장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홍건적 안에서 세력을 키워가다가 각지의 군웅들을 항복시키고 원나라를 몽골로 쫓아낸 후 나라를 세우니 바로 명나라다. 공민왕은 명나라의 연호를 쓰며 친교를 꾀하는 등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우왕 때에 이르러 명나라의 사신이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명나라에서는 들어주기 힘든 배상을 요구했고, 아울러 원래 원나라에 예속돼 있던 고려의 북쪽 땅을 요동의 통치하에 두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고려는 격분했고 명나라와 싸우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1392년 4월 우왕이 “요동정벌은 나의 숙원이니 힘을 다하여 이 목적을 달성할 것”을 당부하며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에 최영·조민수 장군을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출정시켰다. 이때 병력으로는 3만8830명의 군사와 1만1634명의 지원인부 및 2만1682필의 군마였다고 하는데 이 정도의 병력이라면 고려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고 할 수 있다.

음력 5월 7일에는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압록강 지역은 장마가 시작돼 물이 많이 불어 있었다. 많은 군사가 뗏목을 타고 건너다가 수백 명이 익사했다. 압록강을 천신만고 끝에 건너 위화도에 왔으나 위화도와 중국의 요동 사이의 강물은 더 넓고 깊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고려사를 보면 이 해에는 유난히 큰 비가 많았다고 한다.

이성계는 왕에게 장마로 인한 공격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회군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탄원했다. 우왕은 “도망병은 현지에서 참(斬)하라”며 계속 진군할 것을 명령했다. 결국 이성계는 군사를 이끌고 회군을 감행해 실권을 장악한 후 조선을 건국했다.위화도 회군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게 된 우리나라 역사의 가장 큰 사건이었다.

만약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지 않고 명나라와 일전을 겨루었더라면 어땠었을까. 건국 초기였던 명나라로서는 고려와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만일 이때 요동정벌이 이루어져 옛 고구려의 영토를 병합할 수 있었더라면 그 후 우리나라의 역사가 어떠한 형태로 전개됐을까.

고려의 요동정벌 의욕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물거품이 됐다. 그러나 고려의 단호한 결사 항전 의지는 후에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를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단초가 됐다. 그래서 더욱 아쉬움이 남는지도 모른다. 고려 이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쾌거라 할 수 있었던 요동정벌은 장마로 인한 민심과 군심의 이반으로 실패로 돌아간 너무나 아쉬운 전쟁이었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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