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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혹한에 무너진 히틀러의 꿈

입력 2009. 03. 03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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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 우랄의 지하자원, 코카서스의 유전, 시베리아의 삼림자원 등 풍부한 자원을 독일 민족번영의 토대로 삼기 위해 우리는 소련을 정복해야 한다.”(히틀러의 ‘나의 투쟁’ 중에서)공산주의를 극도로 증오했던 히틀러는 소련의 기를 꺾으면서 풍부한 자원을 얻기 위해 1941년 6월 22일 전격적으로 소련을 침공했다.

    19개의 기계화사단을 포함해 총 148개 사단, 전차 3350대, 포 7148문, 항공기 2500여 대를 동원한 엄청난 군사력으로 10주 이내에 모스크바를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방면으로, 중부집단군은 민스크와 스몰렌스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남부집단군은 키에프로 진격했다. 초기 국경지역 전투에서 독일군은 소련군 100만 명을 사살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키에프 방면의 저항이 거세지자 히틀러는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로 향하던 독일군의 주력 기갑부대를 키에프 공격으로 전환시켰다. 주력부대까지 동원한 키에프 공방전에서 독일군은 쾌승을 거뒀다. 키에프 전투에 참가했던 병력을 재편성해 모스크바 방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6주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이 기간 소련군은 모스크바 방어선을 충분히 강화할 수 있었다. 또한 독일군에게 치명적인 적군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날씨였다.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해 가던 독일군이 첫 번째로 만난 것은 가을비였다. 10월 10일부터 11월 10일까지 한 달 간이나 도로와 들판이 진흙탕이 돼 버렸다. 모든 전차 및 장갑차와 기계화부대가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두 번째로 닥친 재난은 혹독한 추위였다. 12월 3일 한파가 몰아닥쳤다. 모스크바의 이날 아침 7시에 관측된 기온은 영하 7.2도였고, 7일에는 무려 영하 28.9도까지 떨어졌다. 독일 야전군 진영에서 관측된 기온은 5일 영하 35도나 됐고, 6일에는 영하 38도가 관측됐다.
    12월에 이어 1월달도 추위는 계속됐다. 유럽지역은 200년 동안에 가장 추운 달이었다. 겨울이 닥치기 전에 소련의 저항을 분쇄하려던 히틀러의 전략 때문에 독일군에게는 방한복이 지급되지 않았다. 독일군은 동상과 질병으로 수없이 죽어갔다. 부동액을 넣지 못한 트럭과 전차가 멈췄고 심한 안개와 낮이 짧아지면서 오후 3시만 되면 작전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모스크바를 코앞에 둔 독일군은 추위와 진창과 피로로 한 발짝도 나갈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독일군에게 죽음을!” 12월 6일 소련군은 주코프 장군의 지휘하에 100개 사단으로 총반격을 시작했다. 현 전선을 사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후퇴는 불가피했다. 무적을 자랑하던 독일군의 신화는 여기서 무참히 깨졌다. 소련을 점령해 독일 민족 번영의 토대로 삼겠다던 히틀러의 꿈도 추위에 얼어버렸다.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하면서 사용한 ‘쐐기와 함정(Keil und Kessel)’ 전법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이 전법은 일명 양익포위전술로도 불린다. 독일은 이 전술로 민스크·스몰렌스크 전투 등에서 소련에 100만 명에 이르는 병력손실을 안겨주었다. 독일이 전술적인 쾌승을 거뒀음에도 결국 패배한 것은 전략적인 실패였다.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소련군의 전략에 넘어갔고, 독일 지휘부의 주공방향에 대한 설정이 미흡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실패는 날씨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최신 장비와 정예 병력과 신전술이라도 날씨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 전투가 모스크바 전투다. “승리하기를 원하는가? 날씨를 알아라.” 손자의 말이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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